고등학교 어느날인가였다. 당시 나의 관심거리는 두 가지였다. 한편으로는 건축을 평생 전공으로 정한 뒤 기대와 조바심에 차 있었다.빨리 대학에 가서 원하는 공부를 하고 싶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무엇인가를 읽고 쓰지 않고는 못배기는 심리상태에 빠져있었다.
이런 심리상태가 처음은 아니었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 일찍 사춘기를 맞은 나는 그 고민을 글읽기와 글쓰기로 분출해오고 있었다.
고교에 들어와서도 같은 생활이 계속되었지만 새로운 상황이 생겨났다. 평생 전공을 건축으로 정한 뒤 이것을 어떻게 글읽기나 글쓰기와 연결시키느냐의 문제였다.
이럴 때 만난 것이 월탄 박종화 선생의 역사 소설 전집이었다.
일부러 찾은 것은 아니었다. 우연한 만남에 가까웠다. 집에는 이러저러한 여러 종류의 전집이 있었다.
부모임께서 자식 성장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라는 바람에서 사 모아 놓으셨던 것 같다. 구색 갖추기 용으로 어느 집에나 있을 그런 전집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월탄 전집이 다른 화려한 전집들 사이에 끼어 있었다.
그리고 고민의 시간을 보내던 고교생의 손에 들어왔다.
붉은 표지의 5권짜리 전집이었다. 돋보기를 쓴 중후한 노인의 모습이 나를 끌었다. 역사소설이라는 대목이 유난히 크게 눈에 들어왔던 기억이 난다.
주로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들이었다. 연산군의 슬픔과 폭정, 중종 때의 왕비와 후궁들, 흥선대원군의 야망과 좌절 등등이었다.
이 가운데 중종과 대원군 얘기는 우연히도 현재 TV에서 가장 인기있는 두 사극의 소재이기도 하다.
월탄의 글은 엄격하면서도 부드러웠고 정확하면서도 매끄러웠다. 역사라는 객관적 소재를 소설이라는 상상의 장르로 풀어내는 솜씨 또한 대단했다.
객관적 엄밀함을 잃지 않으면서 그것을 재미있는 얘기로 들려주고 있었다. 자칫 어색한 부조화로 끝나기 쉬운 어려운 양면적 내용을 하나로 훌륭히 합쳐내고 있었다.
월탄의 소설은 건축과 글쓰기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던 나에게 하나의 본보기가 되었던 것 같다. 물론 그 당장 나에게 어떤 결심이 만들어지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무의식적으로 어떤 가능성을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건축의 역사에 대해 공부하고 글을 쓰는 일을 천생의 업으로 알며 살아가고 있다.
/임석재 이화여대 건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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