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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513)와트 타일러

입력
2002.06.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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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1년 6월15일 영국 농민반란군 지도자 와트 타일러가 국왕 리처드 2세를 면담하는 자리에서 살해됐다. 이로써 달포동안 잉글랜드의 절반을 반란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은 영국 역사상 최대의 농민운동이 일단락됐다. 그러나 이 실패한 농민반란의 아우성 속에서 사람들은 영국 농노제의 조종이 울리는 것을 들었다.와트 타일러의 난을 직접 촉발한 것은 영국 정부가 백년전쟁 전비를 조달하기 위해 15세 이상 모든 주민에게 부과한 인두세였지만, 농민들이 반란을 통해 근원적으로 겨냥한 것은 토지 소유에서 재판권을 거쳐 인격적 지배까지 아울렀던 중세 영주권(領主權)의 폐지였다.

유럽 인구를 거의 절반으로 줄인 페스트도 농민들의 계급적 각성을 도왔다. 1340년 이후 유럽에 확산되기 시작한 페스트가 영국에 상륙한 것은 1348년이다.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처럼 영국 인구도 반으로 줄었고, 영주들은 살아남은 경작 인력에 대한 착취를 강화했다. 농민들은 당연히 농노제 자체를 비판적으로 보게 되었다.

농노 해방, 인두세와 강제부역 폐지, 교회 토지재산의 몰수 등을 목표로 내건 와트 타일러의 난은 존 볼, 잭 스트로 같은 진보적 성직자들의 도움을 받았다. 존 볼은 “아담이 밭을 갈고 이브가 길쌈을 할 때 누가 신사고 누가 농노였나”라는 말로 농노들의 신분해방 의지를 북돋았다.

존 볼의 이 말은 그보다 200년쯤 전 고려의 노비해방운동 지도자 만적이 했다는 “왕후장상(王侯將相)이 어찌 원래부터 씨가 있겠는가”라는 발언을 연상시킨다.

농민군이 런던까지 점령하자 당황한 리처드 2세는 농민군 지도자들을 만나 농노의 신분 자유화와 토지 소유권 등 요구를 모두 들어주겠다고 약속했으나, 그 직후 와트 타일러를 따로 만난 자리에서 런던 시장을 시켜 그를 척살(刺殺)했다.

고종석 편집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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