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의 전원도시 더램에 있는 ‘리서치 트라이앵글 파크(Research Triangle Park)’.2001년 295억 달러(약 36조3,000억 원)의 매출을 올린 영국의 세계적인 제약기업 글락소 스미스클라인의 R&D 센터가 둥지를 틀고 있다. 석ㆍ박사, 의사 등 연구인력만 3,300여 명인 대규모 첨단 연구소이다.
리서치 트라이앵글 파크는 미국 최대인 820만 평 규모의 복합 연구단지로, IBM 시스코 모토롤라 바이엘 아벤티스 듀폰 등 50개 이상의 세계적인 기업들이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게놈 기초 연구를 주도해온 국립보건원(NIH) 산하 국립환경과학연구소도 이 곳에 있다.
글락소 스미스클라인은 2000년 4월 화이자 바이엘 등 대형 제약회사들과 ‘SNP 컨소시엄’을 결성, 개인의 유전적 차이를 결정하는 ‘SNP’ 발굴작업을 벌여왔다. 당초 100만 개의 SNP를 발굴하는 게 목표였지만, 현재 3배나 많은 300만 개를 찾아냈다.
글락소 스미스클라인의 게놈 연구 총 책임자인 알렌 로즈 박사는 “약물의 공격목표가 되는 질병 유발 유전자를 찾아내려면 우선 질병과 연관된 SNP를 구분해 내는 것이 중요하다”며 “지금까지 확보한 SNP를 토대로 인종은 물론 개인적 체질까지 감안한 맞춤형 신약 개발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겠다”라고 말했다.
게놈 정보가 중요한 것은 같은 질병이라도 개인의 유전적 차이를 반영, 효율적인 치료를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유전성이 강한 천식의 전체 유병률(전체 인구 중 천식을 앓는 비율)은 4~5%이지만, 가족 중 한 명이라도 천식 환자가 있는 경우엔 20~25%로 껑충 뛰어오른다.
글락소 스미스클라인은 천식 유발 유전자를 규명하기 위해 1998년 존스홉킨스대 듀크대 등 7개국 10여 개 의료기관과 함께 ‘천식 임상 유전학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4년간 3,000여 명의 천식 환자와 가족들의 DNA 샘플을 채취, 천식의 발생과 진행에 영향을 미치는 유전자를 규명하는 작업이다.
알렌 로즈 박사는 “일단 천식과 연관된 유전자를 찾아낸다 해도, 약물의 공격목표가 되는 단백질의 구조와 기능을 밝히는 힘든 작업이 기다리고 있다”며 “맞춤약 개발까지는 10~15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그는 “세계 유수의 임상치료 기관과 손잡고 심장병 관절염 우울증 관상동맥질환 당뇨병 편두통 만성폐질환 등의 DNA 샘플을 분석하는 네트워크도 추진하고 있다”라고 덧붙였다.
게놈 해독의 성과는 진단 분야에서 가장 먼저 활용될 전망이다. 올해 초 발간된 세계적인 과학잡지 ‘네이처’에는 흥미로운 논문 한 편이 실렸다. 여성 유방암 환자의 75% 가량이 불필요한 항암화학요법과 방사선치료로 고통을 받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종양학교실은 ‘유전자 표시 미세배열(gene-expression microarrays)’이라는 첨단 기법을 이용, 유방암 절제수술 후 5년간 추적관찰을 받은 젊은 여성 환자 78명을 조사했다.
이들의 암세포에서 채취한 유전자 2만5,000개를 DNA 칩 위에 올려 놓고 유전자의 활동 패턴을 분석, 암세포의 전이 여부를 알아내는 방법이다. DNA 칩은 암 덩어리에 있는 특이한 유전자의 활동을 추적하도록 고안됐다. 그 결과 기존의 의학적인 치료기준과는 판이한 데이터가 나왔다.
전이 가능성이 없는 유방암 환자에게 항암화학요법 등 불필요한 보조치료를 하거나, 암세포가 전이될 수 있는 환자에게 치료를 중단한 사례가 4분의 3이나 됐다.
미국 뉴욕에서 동쪽으로 150㎞ 가량 떨어진 뉴저지주 화이트하우스 스테이션. 다국적 제약기업 머크의 포스트 게놈 전략을 지휘하는 글로벌 본부가 위치해 있다.
머크는 지난 해 암 유전자 패턴을 분석하는 기술을 지닌 바이오 벤처기업 ‘로제타 인파머틱스’를 인수했다.
머크 홍보실장 그레고리 리브스는 “유방에 양성 혹이 있는 여성들은 암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있다. 문제는 과연 어떤 혹이 암으로 진행하느냐 여부이다. 개인과 인종에 따라 차이를 보이는 유전자의 패턴을 분석하면 암으로의 진행 여부를 알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유방암 환자의 70~80%는 항암화학요법, 호르몬요법 등 보조적인 치료 없이도 생존이 가능하다. 로제타 인파머틱스가 개발 중인 진단법이 실용화하면 내과의사들이 보조적인 항암치료가 꼭 필요한 환자만 선별해 낼 수 있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유방암 유발 유전자를 ‘표적’으로 하는 신약을 개발하는 것이다”라고 자신감을 보였다.
유전정보를 이용한 ‘맞춤형’ 신약 전쟁도 시작됐다. 머크는 항생제의 내성을 피할 수 있는 신약을 개발 중이다.
항생제 내성을 가진 세균이 분비하는 효소를 공격하는 신약으로, 게놈 정보가 이 효소의 3차원 분자구조를 알아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난치병인 암이나 비만의 정복도 이젠 시간 문제이다. 암은 유전자의 이상으로 생긴다. 어떤 유전자의 이상으로 암이 생기고 진행되는지 알 수 있다면, 기존 항암제보다 부작용이 적고 개인차까지 감안한 맞춤 항암제 개발이 가능하다.
글락소 스미스클라인의 알렌 로즈 박사는 “암의 발생과 진행에 영향을 미치는 유전자가 밝혀지면, 항암제 개발에 이용할 수 있는 풍부한 유전자 표적을 갖게 되는 셈”이라고 말했다.
비만은 동물실험 결과 ‘렙틴’이라는 유전자가 관여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1994년 렙틴 유전자를 발견한 미 록펠러대 유전학 교수 제프리 프리드만 교수는 “비만을 100% 유전적인 질병이라고 보긴 어렵지만, 렙틴 유전자가 비만의 진행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분명하다”고 밝혔다.
머크 연구소의 렉스 플로그 박사는 “비만을 유발하는 렙틴 유전자를 공격하면 많이 먹어도 살이 찌지 않는 시대가 올지 모른다”라고 전망했다.
10년 전만 해도 비밀에 쌓여 있던 알츠하이머병(노인성치매)도 점차 그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
미 메이오 클리닉 약리학 교수인 존 하디 박사는 “미국에선 매년 10만 명이 알츠하이머병으로 목숨을 잃는다”며 “최근 연구결과 7가지의 서로 다른 유전자가 치매 진행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밝혀진 만큼 치매를 퇴치할 날도 머지 않았다”고 말했다.
/더램(미 노스캐롤라이나주)·화이트하우스 스테이션(미 뉴저지주)=고재학기자
goindol@hk.co.kr
■ 글락소社 유전학 연구이사 홀링스워스
“지금처럼 단일 질환에 단일 약을 복용하는 시대는 10년내 종식을 고할 것입니다” 글락소 스미스클라인의 ‘리서치 트라이앵글 파크 R&D 센터’에서 만난 유전학 연구 담당 이사 로버트 홀링스워스(40) 박사는 의사가 개인의 유전적 특성을 비교, ‘맞춤약’을 제공하는 시대가 머지 않았다고 진단했다.
그는 이 연구소 유전학 분야 연구진 100여 명을 지휘하며 글락소 스미스클라인의 ‘포스트 게놈 프로젝트’를 이끄는 야전 사령관.
“우리는 총 연구개발비 40억 달러(약 5조 원)의 3분의 1 가량을 유전학 분야에 투자하고 있다. 5년 전 가장 앞서 유전학 연구팀을 만들었고, 각종 질병의 DNA 샘플을 분석하는 네트워크를 구축한 것도 우리 뿐이다. 2년 전에는 DNA 칩 개발분야의 선두 주자인 바이오 벤처 ‘애피매트릭스(Affymetrix)’의 주식 76%를 인수하는 등 전략적 제휴를 확대하고 있다”
게놈 해독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설명은 명쾌했다. “약은 독이다. 체내로 흡수되는 과정에서 정상적인 조직을 자극하고 효과도 일정하지 않다. 개인과 인종간 유전적 특성을 무시하다 보니 어떤 환자들에겐 치명적인 부작용을 유발한다.
매년 10만 명의 미국인들이 약화사고로 목숨을 잃는 게 현실이다. 유전정보를 이용해 특정 약물에 과민반응을 보이는 체질을 알아내면 약화사고를 예방할 수 있다.”
게놈의 은총이 지구촌 전체에 미칠지 의문이 들었다. 에이즈 환자가 가장 많은 아프리카가 에이즈 신약의 혜택에서 소외되듯이, 유전정보를 응용한 맞춤형 신약의 혜택이 상당기간 구매력 있는 백인들에게 집중될 가능성은 없는 것일까.
홀링스워스 박사는 “우리는 민간기업이고 미국과 유럽의 주류인 백인 주주들의 이익을 대변할 수밖에 없다.
암 치료분야의 경우 백인들에게 많은 전립선암이나 유방암 위주의 연구가 진행될 가능성이 높은 게 사실이다. 신약 개발에는 엄청난 자금과 인력이 투입되는 만큼 상업적 측면을 무시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제약기업은 휴머니즘과 상업주의의 균형을 잡는 노력을 절대 포기해선 안 된다”라고 솔직히 토로했다.
/고재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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