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자유치만이 유일한 생존전략이었던 싱가포르가 인위적으로 잘 가꿔진 비즈니스 천국이라면, 상하이(上海)는 13억 시장을 밑천으로 블랙홀처럼 외자를 끌어들이는 비즈니스의 신천지이다.세계 500대기업 가운데 280여개가 이미 상하이에 진출해 있다. 단순히 개별 기업들이 ‘몰려오는’ 차원을 넘어, 싱가포르 홍콩 등에 있던 아시아의 지역본부(헤드쿼터)까지 통째로 ‘옮겨오고’ 있다.
그러나 내부를 살펴보면 의아심이 든다. 상하이 홍차우(虹橋) 공항은 우리나라 고속버스터미널 규모에 불과했고, 면세점은 노점상 수준이었다. 외국인이 택시를 타려면 한자로 적어 택시기사에게 보여줘야 한다.
현지 주재원들도 외화송금이나 CNN방송 시청이 자유롭지 못하다고 불평한다. 상하이를 내집처럼 방문해도 석달마다 비자를 갱신해야 하고, 법인세율을 낮췄다가도 돌연 올려버리는 그런 도시다. 아시아의 중심, 허브(hub)가 되기에는 상하이는 너무도 거만한 도시였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에는 거의 없다시피 한 다국적기업 지역본부가 40개가 넘는다. GM IBM 알카텔 코닥 지멘스 로슈 등과 같은 세계적 기업들이 상하이 인근에 공장을 세우면서 관리ㆍ지원ㆍ상품개발ㆍ인력개발 등의 제조업 거점을 싱가포르 등 동남아로부터 옮겨왔다. 일부는 물류ㆍ영업 거점을 홍콩 등으로부터 끌고 왔다. 듀퐁 GE 폭스바겐 등은 아시아 연구개발(R&D) 거점을 이곳에 세웠다.
우리나라는 아직 허브로 가는 길조차 못 찾고 있는데, 다국적 기업들은 이미 상하이를 중심으로 아시아 도시들에 대한 기능 재편에 착수한 것이다.
결국 끝도 없이 공급되는 노동시장과 끝도 없이 수요가 일어나는 소비시장 때문이다. 비즈니스의 천국도 아닌 상하이가 배짱을 부릴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상하이시 인민정부 발전연구중심 우슈이(吳修藝) 주임은 외자 진출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홍콩과 싱가포르에는 30년 이상 갈고 닦은 금융 허브, 비즈니스 허브의 노하우가 있지만, 대신 우리는 제조 허브와 R&D 허브, 물류 허브가 가능한 시장과 하드웨어가 있다.”
중국 정부가 상하이를 허브기지로 선택한 이유도 ‘시장’이라는 무기를 십분 활용하기 위해서다. 상하이는 중국을 동서로 관통하는 장장 6,300㎞의 양쯔(楊子)강-그래서 중국인들이 창장(長江)이라고도 부른다-이 서해와 만나는 곳이다.
중국 전체 소비의 40%를 점유하는 화둥(華東) 경제권을 배후로 하고, 난징(南京)-항저우(杭州)-쑤저우(蘇州)-낭저우(揚州)로 이어지는 중국 최대의 첨단 산업벨트인 ‘창장(長江) 삼각주’를 바로 뒷마당에 두고 있다.
상하이런(上海人)들이 칭하듯 상하이는 용(양쯔강)의 머리, 활(화둥경제권)의 화살촉인 셈이다. 덩샤오핑(鄧小平)의 ‘점-선-면’ 전략도 상하이에 꼭지점을 찍고 조금씩 키우게 되면, 결국 나라 전체가 상하이처럼 잘 살게 될 것이라는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상하이는 1842년 아편전쟁 이후 100여년동안 서구 열강의 중국 진출 거점이었다. 당시만해도 상하이는 아시아 제일의 개방도시, 즉 아시아 허브의 원조였다.
중국 정부는 상하이를 중국의 ‘쇼윈도’로 만들기 위해 내륙과는 전혀 다른, 번듯하고 자본주의 보다 더 자본주의적인 도시로 새롭게 단장했다.
농토에 불과하던 푸동(浦東)지구(523㎢ㆍ서울보다 조금 적다)를 10년만에 첨단 비즈니스 타운과 하이테크 단지로 탈바꿈시켰고, 30층 이상 고층빌딩 2,700개를 새로 올렸다.
수심(8.5~12.5m)이 얕아 우리 정부가 부산ㆍ광양항과는 게임이 안될 것이라고 단언했던 상하이항의 인근 섬들에는 52개 대형 선박이 동시에 접안할 수 있는 대형 컨테이너 항만(15~30m)을 건설중이다.
상하이와는 27㎞ 연륙교(도로ㆍ철도 겸용)로 연결된다. 95년 물동량 기준 세계 20위이던 상하이항은 지난해 이미 5위로 올라섰다.
또 홍차우 공항을 대신해 푸동공항을 1999년 10월 개항했고 올 10월 모든 국제선을 집결시킬 계획이다. 내년이면 자기부상열차가 개통돼 시내로 8분만에 갈 수 있다.
의식도 자본주의화 했다. 상하이에서 가장 오래된 난징루(南京路) 제일백화점(上海第一百貨店) 정문은 들어가기 낯 뜨거울 정도로 여성 속옷 광고가 도배질 돼 있다. 그 앞에서 상하이 젊은이들이 껴안고 키스를 나눠도 하등 이상할 것 없는 서구형 도시로 변모했다.
문화대혁명의 진원지, 공산당 1차대회가 열렸던 중국 공산주의 탄생지라는 것은 마오쩌둥(毛澤東) 동상에서만 확인할 수 있었다.
배후 시장은 광할하고, 인프라도 갖췄고 더욱이 시민들의 의식도 서구화하는 등 상하이는 이제 소프트웨어 빼고는 허브의 필요조건은 모두 갖춘 셈이다.
뒤떨어지는 소프트웨어가 허브전략에 결정적 걸림돌이 되지 않겠냐는 질문에 “다국적기업은 중국의 규모를 보고 오는 거다. 비즈니스 환경이 떨어진다고 돌아갈 사람들이 아니다. 소프트웨어는 점차 개선될 것이다”는 상하이시 외국투자촉진중심의 장민(江敏) 과장의 답변에는 중국적인 배짱이 있었다.
협찬: 한국원자력 문화재단
상하이=유병률기자
bryu@hk.co.kr
■상하이-홍콩 '윈윈 파트너'
상하이가 아시아의 신(新) 허브로 부상하면서 아시아 주요 도시가운데 가장 다급해진 곳은 홍콩. 그동안 중국의 관문, 다국적기업의 중국본부 역할을 해왔지만 이제 사정이 달라졌다.
바이엘 코카콜라 등과 같은 세계적 기업들은 물론, 씨티은행 HSBC ABN암로 등 다국적은행들도 중국본부를 최근 상하이로 옮겼다.
시장이 열리고, 중국의 불확실성도 한층 제거된 마당에 중국본부를 굳이 멀리 둘 필요가 없어졌다. 일부 다국적기업은 아시아 헤드쿼터 기능을 이전하기도 한다.
머지않아 상하이가 홍콩을 대체할 것이라는 분석도 이 때문이다. 상하이시 외국투자촉진중심의 장민(江敏) 과장은 “5~10년이면 물류, 10~15년이면 금융에서 홍콩을 추월할 수 있다. 아시아 허브로서의 홍콩 위상은 점차 약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상하이와 홍콩 관계는 대체재가 아니라 보완재라는 분석이 더욱 우세하다. 제조업 기반이 취약한 홍콩의 약점을 상하이(중국)가 보완, 중장기적으로는 오히려 홍콩에는 득이 된다는 것.
중국 건설은행 첸쥔제(陳俊杰) 부행장은 “홍콩이 선전 등 화남(華南)경제권의 관문이라면 상하이는 화둥(華東)경제권을 배후시장을 하고 있다. 또 상하이가 생산과 R&D(연구개발)분야에 우수하다면, 홍콩은 하이테크제품 상품화에 탁월해, 대체관계라는 주장은 오해”라고 못박았다.
금융에 있어서도 홍콩이 뉴욕과 런던과 같은 국제금융센터라면 상하이는 일본 도쿄와 같은 국내금융센터라는 분석이다.
“2000년 5월 중국본부를 홍콩의 아시아 헤드쿼터에서 떼내 왔지만, 홍콩의 헤드쿼터까지 옮겨올 가능성은 없다. 홍콩의 비즈니스 환경을 포기할 수 없고, 일관성이 떨어지는 중국 정부를 아직 신뢰할 수 없다.”(HSBC 중국본부 창단단ㆍ張丹丹 대변인)
중국 정부도 지금은 중국 내륙 개발을 위해 전술적으로 상하이 허브화에 열을 올리고 있지만 중장기적으로는 홍콩과의 보완관계를 구축해야 한다는 쪽에 가깝다.
그러나 상하이가 홍콩을 대체하든, 경쟁하며 상생(相生)하든 한국에는 치명적 위협이다. 상하이가 생산과 R&D 허브가 되고, 홍콩이 비즈니스와 금융 허브로 역할을 분담한다면 한국은 그 틈새에서 압사당할 수밖에 없다.
상하이가 비즈니스ㆍ금융까지 통째 삼킨다면 중국시장을 발판으로 허브화를 도모해야 하는 한국의 입지는 더욱 협소해질 수밖에 없다.
상하이=유병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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