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P씨(37ㆍ여)는 한국팀과 미국팀의 경기가 있던 10일 검정색 투피스를 입고 출근했다가 동료들로부터 엄청난 핀잔을 들었다.월드컵 16강 고지를 향한 중요 경기에 상복을 연상시키는 검정색을 입고와 부정을 타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전반전 미국이 선제골을 터뜨리면서 동료들의 핀잔은 횟수를 더해 갔고 결국 P씨는 후반전 시작에 맞춰 동료로부터 빌린 빨강색 티셔츠를 갈아 입었다.
P씨는 “다행히 후반전에 한 골을 넣어 무승부가 됐기에 망정이지 졌으면 두고두고 원망(?)을 들을 뻔했다”며 고개를 저었다.
색의 제왕으로 불리는 검정색조차 올 6월에는 빛이 바래고 있다. 한국팀의 경기가 있을 때마다 광화문과 시청 앞 등 전국의 주요 거리응원장소를 진홍으로 물들이는 붉은색 때문이다.
월드컵대표팀 응원단 ‘붉은 악마’의 상징색에서 출발, 16강 진출을 기원하는 한국민들의 염원을 상징하는 색깔로 격상된 붉은색은 이제 단순한 응원용 소도구에서 벗어나 일상의 패션 속에 깊숙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빨강색 티셔츠나 점퍼 두건 등 캐주얼 의류는 물론 정장용 원피스와 구두 운동화 수건에 이르기까지 빨강색 패션용품을 걸친 사람들을 거리에서 쉽게 볼 수 있다.
빨강은 너무 튀고 자극적이라 웬만큼 패션감각이 있는 멋장이들도 액센트용으로 만족할 만큼 조심스럽게 사용하는 색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파격이다.
이달 초 붉은색 민소매 원피스를 구입했다는 직장인 조은주(36ㆍFnC코오롱)씨는 “예전엔 붉은색 원피스는 너무 대담해 보여서 입기 망설였는 데 올해는 월드컵 덕에 붉은색 원피스를 입는 게 자연스럽다”며 “보는 사람도 ‘튄다’는 반응보다는 재치있는 월드컵 패션이라는 반응이어서 기분 좋다”고 말했다.
교사 이지숙(34ㆍ당곡중)씨는 “아이들 사이에서 한국전이 없는 날도 교복 안에 빨간색 티셔츠를 받쳐입는 것이 유행이다. 또 팔뚝에 빨간색으로 ‘코리아(KOREA)’라고 써넣고 다니는 보디페인팅도 남학생들 사이에서 인기를 모으고 있다”고 전했다.
또 동대문 패션몰 두타에서 만난 주부 심경옥(41ㆍ서울 마포구 공덕동)씨는 “빨간색이라면 질색을 하던 남편이 재킷 안에 받쳐입게 한 벌 사다 달래서 나왔다. 붉은 악마 티셔츠는 너무 캐주얼하니까 글씨가 쓰여 있지 않은 무난한 스타일로 사라고 하더라”라며 “요즘은 남자들도 시대에 뒤쳐지지 않으려고 빨강색을 원하는 모양”이라며 웃었다.
패션업체들의 붉은색 의류생산도 많이 늘었다. 여성복 브랜드 ‘씨(Si)’는 월드컵 특수를 겨냥해 ‘씨 스포츠’ 라인을 새롭게 선보이면서 붉은 색을 메인 칼라로 삼았다.
캐주얼브랜드 ‘후부’와 ‘헤드’ 는 붉은색을 기조로 한 월드컵 관련 티셔츠와 헤어 밴드 등의 품목을 10% 정도 늘렸다.
유아용 브랜드 ‘유나이티드갭(UnitedGab)’은 빨강이 너무 자극적이라는 이유로 아예 쓰지 않다가 월드컵 특수를 타고 올해 처음 빨강색 유아복을 내놨다.
붉은색이 일상으로 들어오면서 색채 이미지도 급격히 변화하고 있다.
삼성패션연구소 패션기획팀장 서정미씨는 “중국 사람들이 전통적으로 붉은 색을 ‘재복’ 혹은 ‘경사’의 상징으로 받아들여 빨강색 부적이나 지갑을 많이 사용했으나 한국에선 붉은 색이 ‘빨갱이’로 지칭되던 레드 콤플렉스의 상징이며 불조심 포스터의 단골 색상으로 불안을 조성하는 이미지였다”면서 “그러나 올해 붉은 악마의 열기가 폭발하면서 빨강은 국민의 단결을 상징하는 색으로 환골탈태했다.
또 온 가족이 빨강색 티셔츠를 입고 응원하는 것이 일반화하면서 패밀리룩의 대명사로도 자리잡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렇다면 올 여름을 휩쓸고 있는 레드 패션의 열기는 얼마나 지속될까? 패션디자이너 심씨는 “아쉽게도 레드 열풍은 올 가을까지가 끝일 것“이라고 전망했다.
붉은색은 강한 만큼 쉽게 질리기 때문에 지속성 있는 패션 트렌드로 자리잡기엔 역부족이라는 평가다.
다만 월드컵 특수를 타고 그동안 조심스럽기만 했던 붉은색 의류를 사람들이 한결 편하게 즐기게 된 것은 큰 소득이다.
또한 국가 이미지를 향상시키는 견인차 역할을 한 것은 높이 평가해야 할 대목이다.
심씨는 “백의민족이라는 말 대신 홍의민족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붉은색이 한국의 고유색상으로 떠올랐다”며 “붉은 색은 한국이 수동적이고 신비에 싸인 동양의 소국에서 지구촌에 끊임없는 자극을 제공하는 역동적이고 정열적인 나라라는 이미지를 심어 줄 것”이라고 평했다.
이성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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