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5년 6월12일 서울 동작구 노량진동 사육신 묘에 육각(六角) 묘비가 세워졌다. 서울시가 묘역을 수축하면서 사육신의 충절과 의기를 기려 묘비를 세운 것이다.당시 그 자리에는 성삼문(成三問)ㆍ박팽년(朴彭年)ㆍ이개(李塏)ㆍ유응부(兪應孚) 네 사람만 묻혀 있었으나, 1977년부터 1978년 사이에 하위지(河緯地)ㆍ유성원(柳誠源)ㆍ김문기(金文起)의 가묘(假墓)도 추봉(追封)했다. 이로써 사육신의 음택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됐다.
익히 알려져 있듯이 사육신은 숙부 수양대군(세조)에게 왕위를 찬탈당한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발각돼 순사한 조선 전기의 여섯 신하를 가리킨다. 일반적으로 승지 성삼문, 형조참판 박팽년, 예조참판 하위지, 직제학 이개, 중추원동지사 유응부, 사예(司藝) 유성원을 꼽지만, 공조판서 김문기를 넣기도 한다.
김문기의 본관은 금녕(金寧)이고 자는 여공(汝恭), 호는 백촌(白村)이다. 세종 8년(1426년)에 문과에 급제했으나 아버지 상을 당해 3년간 시묘한 뒤 예문관 검열(檢閱), 정언(正言), 함길도 관찰사를 지냈다.
단종 복위 모의에 가담했다가 살해됐으나, 영조 때 9대손 정구(鼎九)의 송원(訟寃)으로 복관됐고, 경북 김천시 지례면의 섬계서원(剡溪書院)에 배향(配享)됐다.
김문기를 제외한 사육신의 관직이 복구되고 그들을 기려 민절(愍節)이라는 사액(賜額)이 내려진 것은 숙종 17년(1691년)이지만, 그 전부터 이들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지조와 죽음을 대하는 당당함으로 조선 조 유자(儒者)들의 사표(師表)가 되었다.
달군 쇠로 다리를 꿰고 팔을 잘라내는 잔학한 고문에도 굴복하지 않고 세조를 ‘나리’라고 불러 군주로 대접하지 않은 성삼문을 비롯해, 일곱 사람 모두 살 길을 도모하지 않았다.
고종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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