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축구 한국-미국전이 열린 10일 낮 서울 도심. 차가운 장대비 속에서도 30만명에 달하는 시민들이 지칠 줄 모르는 구호와 박수로 거리를 뜨겁게 달궜다.대부분 ‘Be the Reds’ ‘Go! Korea’ 등이 씌어진 붉은 셔츠 차림이었다. 축제 분위기가 한껏 달아오를 무렵 일단의 대학생들이 군중에 끼어 들었다.
티셔츠에 ‘Fucking USA’ 문구를 적은 이들은 그러나 얼마 지나지않아 머쓱해진 표정으로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같은 시각 일부 대학가에서도 반미시위가 벌어지고 격한 구호들이 외쳐지기도 했지만 경기 시작과 함께 어느 틈엔가 모두 사라져 버렸다.
TV 스트린과 전광판에 펼쳐지는 경기장면을 좇으며 연신 터지는 “대~한민국” “오, 필승 코리아” 함성 속에 다른 ‘의도’가 틈입할 여지는 전혀 없었다.
후반 한국팀의 동점골이 터질 때까지 한동안 불안감에 휩싸였을 때도 군중 속 어디서든 정치적인 구호는 들리지 않았다.
안정환선수 등이 동계올림픽 편파판정을 패러디한 뜻밖의 골 세리머니를 펼쳤을 때는 박장대소와 함께 휘파람, 환호가 터져 나왔다.
그게 다였다. 오히려 한국이 시종 주도권을 장악한 경기 후반 간간이 미국팀이 좋은 플레이를 보일 때는 “잘 한다” 등의 격려마저 나왔다.
끝내 미국을 꺾지 못한채 아쉽게 경기가 끝났지만 광화문 일대를 겹겹이 둘러싼 경찰들은 더 이상 긴장한 표정이 아니었다. 응원을 마친 젊은이들은 비 내리는 미 대사관 앞을 떼지어 걸어 지나면서 둘러선 경찰에게 박수를 보냈다.
확실히 우리 시민의식은 세계가 경탄할만한 수준에 올라있다. 앞으로 대표팀의 경기결과가 어떻든 우리 스스로가 이미 확인한 자긍심이야말로 이번 월드컵의 가장 값진 성과가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찬유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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