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장에도 거리에도 붉은 파도가 일렁인다. 초록의 자연을 살찌우는 이글거리는 태양처럼 4,700만 겨레가 붉은 옷으로 갈아 입었다.남녀노소, 빈부의 벽도 없다. 한국축구의 승리와 도약을 위한 간절한 마음만 가득하다. 붉은 옷은 이제 더 이상 옷이 아니다. 마음이다. 모두를 하나로 묶어주는 새로운 힘이 됐다.
한국일보는 일찌감치 그 힘을 예감했고, 지금 이 순간 그 힘을 확인했다. 그래서 월드컵 개막 100일 전인 2월20일부터 대한축구협회와 공동으로 한국팀의 경기가 열리는 날 ‘붉은 옷을 입자’는 캠페인을 시작했다.
붉은 옷은 더 이상 ‘붉은악마’의 전유물이 아니다. 한국일보는 국민 모두 기꺼이 ‘붉은악마’가 되리라 믿었다.
그 믿음은 4일, 10일 부산과 대구에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 아침부터 한국일보의 붉은 셔츠를 받으러 몰려든 사람들, 그들은 자랑스럽게 그 옷을 입고 경기장으로 달려가서는 목이 터져라 응원했다.
한국일보가 이뤄낸 붉은 물결은 한국팀이 지칠 때는 힘이 돼주고, 한국팀이 승리할 때 기쁨을 함께 나누었다.
우리 역사에 이런 일이 있었던가. 거슬러 올라가면 1919년 3월1일, 200만 백의의 동포가 독립을 위해 하나가 됐던 그 날이 이랬을까.
광복의 기쁨을 소리쳐 외치던 1945년 8월15일의 거리가 이랬을까. 60억 지구촌이 거대한 우리의 붉은 에너지에, 단합된 마음에 놀랐다. 그 놀라움을 외신들은 이렇게 전했다. “한마디로 믿을 수 없는 분위기”(BBC) “이들의 열광은 독특한 한국의 브랜드로 자리잡았다”(로이터 통신) “새빨간 스탠드가 광희(狂喜)였다”(교도 통신).
놀란 것은 외신들만이 아니었다. 4일 부산 아시아드주경기장에 온 김대중(金大中) 대통령과 귀빈들도 깜짝 놀랐다.
경기장 전체가 붉은 물결인 것을 보고 감격한 김 대통령은 정몽준 대한축구협회장으로부터 그 진원지가 한국일보라는 이야기를 듣고 흐뭇해 했다. 무엇으로 이런 국민 화합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붉은 옷은 히딩크와 우리 선수들에게는 더 없이 든든한 12번째 선수가 됐고, 상대 팀에게는 무시무시한 존재가 됐다.
0-2로 패하고는 붉은 옷의 함성에 정신이 없었다는 폴란드 예지 감독과 선수들, 붉은 물결을 무서워 선수들에게 정신교육까지 시켰다는 미국 브루스 어리나 감독. 아마 그들이 진정 무서워 한 것은 붉은 옷과 함성이 아니라 하나가 된 한국인의 저력이었을 것이다.
그 앞에 한국일보가 있었다. 그리고 14일 포르투갈과 일전이 벌어지는 인천에 또 한번의 한국축구와 한민족의 웅장한 비상을 위해 붉은 옷을 한아름 안고 달려 갈것이다.
이대현기자
leedh@hk.co.kr
■붉은 색의 의미
붉은 색은 청 백 흑 황과 더불어 오방색의 하나다. 본디 남쪽을 뜻하는 주작(朱雀)으로 재앙이나 악귀를 쫓는 주술색이다.
부적이나 인주가 붉은 주사인 것도 같은 원리다. 한국의 미를 흰옷, 백자로만 정의 내림은 잘못된 미감이다.
민화를 예로 들자면 그 강렬한 진채에서 붉음의 미학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태극기나 단청, 색동옷, 심지어 일편단심의 단심(丹心)에서 붉은 색을 빼버린다면? 무슨 답변이 필요하라.
민간 심성으로도 복을 불러들이는 색깔이기 때문에 지극한 사랑을 받았다. 한국인이 발견해낸 아름다운 천연염색의 하나로 잇꼿(홍화)을 꼽는다. 진하게 물들이면 붉은색, 연하면 분홍색이 된다.
그러나 ‘레드 콤플렉스’ 때문에 붉은 색은 50여년을 통제당하면서 잃어버린 색이 되었다.
악마는 희생양을 전제로 하는 바, 붉은 피를 뿌리고 사육제를 집행하는 의례를 떠올리게 한다. 현대 스포츠는 그 자체가 하나의 집단적인 사육제이다.
게다가 스포츠의 열정은 아무리 무어라 해도 붉은 색을 당할 색깔이 없을 성 싶다. 붉은 악마의 재앙 쫓는 그 색깔이 우리 문전의 골을 막아주는 지킴이 색이 되고 있다.
■붉은 옷 입기 캠페인 일지
▦2월20일(본선 개막 D-100일):붉은 옷 입기 캠페인 시작. 민속학자 주강현 ‘붉음의 미학’ 특별기고
▦4월11일(D-50일):붉은 악마 신인철 단장 특별기고
▦5월1일(D-30일):1면 사고 및 정몽준 축구협회장 특별기고
▦5월21일(D-10일):이회창 한나라당 대통령후보와 노무현 민주당 대통령 후보의 격려기고
▦6월3일:1면사고 ‘내일 오후 부산시청서 붉은 셔츠 나눠드립니다’
▦6월4일:부산시청 앞에서 붉은 셔츠 배포
▦6월9일:1면 사고 ‘내일 낮 대구서 붉은 셔츠 나눠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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