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는 비겼지만 우리의 응원문화와 시민의식은 완벽한 승기를 거뒀다.6·10 민주항쟁 이후 꼭 15년만인 2002년 6월10일. 서울시청 앞 광장은 또다시 그날과 같은 함성으로 가득찼다. 후반 33분 마침내 천금과 같은 동점골이 안정환의 발끝에서 터져나온 순간 광장을 메운 붉은 물결은 거대한 해일로 변했다. 쏟아지는 폭우도 붉은 악마와 시민들의 뜨거운 열기를 식히기에 역부족이었다.
■붉은 열기에 뒤덮인 월드컵 해방구
경기 종료를 알리는 휘슬이 길게 울려 퍼지는 순간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는 안타까운 탄식과 함께 그래도 잘 싸웠다는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는 곧 이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대한민국 만세”가 터져 나왔다. “다음 경기에 반드시 포르투갈을 꺾어 16강으로 나아가자” 사람들은 서로 서로에게 악수를 건네며 14일을 기약했다.
인파는 이후 노도처럼 광화문과 종로 등 도심일대로 퍼져 나갔다. 퇴근차량들은 거센 빗발과 인파에 갇혔어도 불평하는 대신 도리어 “짝짝짝 짝짝” 박수장단에 경적을 울려 호응했다.
시청앞 광장은 출근전쟁이 막 시작된 오전 7시께부터 벌써 붉은 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오, 필승! 코리아” “대-한민국” 등 응원가가 울려퍼지고,한국팀의 16강 진출을 염원하는 플래카드가 곳곳에 나붙었다. 음악과 춤에다 도시락과 음료수, 돗자리까지 챙겨나온 시민들로 인해 시청앞 광장은 거대한 축제의 마당이 됐다.
정오를 넘어서면서 이미 붉은 인파는 10만명까지 불어나 광장 전체를 덮어버렸다.
그날을 다시 느껴보고자 조퇴에 휴가까지 내 시청앞 광장을 찾은 넥타이부대도 많았다. 15년전 이 곳 시청 앞 광장에 있었다는 회사원 성모(35)씨는 “감개무량하다. 그동안 삶에 쫓겨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감격이 되살아난다”고 감개무량한 표정을 지었고,김동건(24)씨는 “우리 대표팀이 기대했던 통쾌한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선배들로부터 전해들은 그날의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느껴볼 수 있어 좋았다”며 한·미전 무승부의 아쉬움을 달랬다.
■자랑스러운 응원문화,시민의식
돌발적인 반미시위나 흥분한 군중에 대한 우려는 그야말로 한낱 기우가 됐다.이날 우리의 응원문화는 또다시 세계의 경탄을 자아내고도 남을만한 것이었다.
경기시작 1시간 전부터 억수같은 비가 내리기 시작했지만 사람들은 미동도 않은 채 질서를 유지했을 뿐 아니라,심지어 전광판 화면을 가릴까봐 뒷사람을 위해 우산을 내리고 비를맞는 모습들이 여기저기서 눈에 띄었다.
시청과 광화문 일대에만 무려 53개 중대 6,000여명을 동원,인근 주한미국대사관 등 주요 건물들을 이중 삼중으로 에워쌌다. 미 대사관 외곽의 경찰들은 시민감정을 의식한 듯 대부분 얼굴이 표정이 굳어 있었고, 대사관 정문 안쪽에서 출입차량들을 검색하는 경비요원들도 평소와 다른 긴장된 모습이 역력했다. 하지만 시민들의 질서 정연한 응원모습에 이내 표정을 풀었다. 노골적인 반미구호는 어디서도 들리지 않았다.붉은 악마 한모(23)씨는 "반미시위 등의 얘기가 나왔을 때 우린 코방귀를 뀌었다.우리가 그들과 같은 부류로 취급받을 수는 없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한 외신기자는 "엄청난 군중이 마치 한마음 한몸처럼 움직이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 어떤 무질서나 적대감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은 정말 경이로운일"이라며 "이렇게 감동적인 장관은 평생 어디서도 다시 보기 힘들 것 같다"고 감탄사를 연발했다.
이동훈기자
dhlee@hk.co.kr
고찬유기자
jutd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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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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