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 -채호기-
전화로 들리는 당신 목소리
귓구멍을 살금살금 후비는 붓털처럼 간지러워요.
바다가 보이는 창을 함께 바라봤던 날 저녁
당신은 “행복해요, 행복해요”라고 떨리는
차갑고 상쾌한 소독용 알코올을
병든 내 귀에 떨어뜨렸지요.
당신의 아침 같은 이마와
밤바다의 해안선같이 휘어진
海松에 젖어 있는 당신의 입술이
내 망막에 환등기처럼 켜졌다 꺼졌다 해요.
수화기 저 편에서 들리는 당신의 기침 소리
내 허파의 얇은 떨림판들을 부르르 떨게 해요.
아프지 말아요 부디
더 이상 더 심하게는 아프지 말아요.
■시인의 말
시는 에둘러 말하거나 최대한 감추면서 말하기이다. 사랑의 말도 이와 같다. 예전부터 사랑의 매개체는 편지라고 하지만 전화라고 반드시 직설적으로 말하는 것은 아니다.
전화도 상대를 숨기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글자에 비한다면 소리는 얼마나 육감적인가. 육감은 소통을 증폭시키고 사랑을 증폭시킨다.
●약력
▲1957년 대구 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ㆍ대전대 국문과 졸업 ▲1988년 계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 ▲시집 ‘지독한 사랑’ ‘슬픈 게이’ ‘밤의 공중전화’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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