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세계 해양을 지배했던 네덜란드가 신이 내린 물류 중심지라면, 1965년 말레이시아로부터 독립한 싱가포르는 인간이 건설한 세계 비즈니스의 천국이다.창이 공항에 내리면 어디든 20~30분이면 족하다. 국토(서울보다 조금 크다)가 좁아서가 아니라, 교통 체증이 없어서다.
영어만 할 줄 알면 공항 청소부에서 택시 기사, 상점 주인까지 누구든 의사 소통이 가능하고, 이들이 외국인을 대하는 태도는 내국인 대하듯 자연스럽다.
몇 달이라도 살아본 사람들의 점수는 더 후하다. 신용카드 연체나 불법 주차도 사유만 합당하면 수수료와 벌금을 돌려준다. 법인세 부과가 애매하다고 항의하면 환급해주고, 실적 좋은 외국기업은 세금을 더 깎아준다.
규제는 단순 명쾌하고, 공무원을 따로 만날 필요도 없다. 단점이라곤 후덥지근한 날씨뿐, 외국 주재원들에게는 비즈니스의, 그 가족들에게는 생활과 교육의 천국이다.
인구 4명중 1명이 비즈니스를 위해 1년이상 장기체류한 외국인들과 그 가족들인 것도 바로 이때문이다.
40여년전만 해도 수돗물조차 말레이시아에서 사와야 했던 척박의 땅, 싱가포르였다. 리콴유(李光耀) 전 총리는 회고록에서 “자산이라곤 동ㆍ서남아 중간에 위치했다는 지리적 이점과 영어를 쓸 수 있는 1만명(당시 인구의 0.5%)의 인력뿐이었다”고 서술했다.
그런 싱가포르에서 지금은 5,000여개 외국기업이, 220여개 다국적기업의 아시아ㆍ태평양 지역본부가 장사를 하고 있다. 이들은 싱가포르 고용의 52%, 국내총생산(GDP)의 35%를 담당하고 있다.
다국적 기업들이 동남아로 수출하는 화물 보따리를 싣고 와 풀어 놓고, 다시 동남아 생산기지에서 만든 상품을 집결시켜 세계로 재수출하는 명실상부한 동남아 최고 허브(hub)로 성장한 것이다.
일본무역진흥회(JETRO) 싱가포르 사무소 아쯔서키 가와다 부장은 싱가포르의 성장 전략을 이렇게 요약했다. “싱가포르는 동남아라는 배후시장을 밑천으로, 이를 외국기업에게 팔아 국부(國富)를 창출해왔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우리나라보다 5,000달러가 더 많다.
‘외국기업을 뜯어먹고 사는 나라’라는 아시아의 비아냥도 아무도 가지 못한 길을 먼저 선점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싱가포르의 성공 신화의 중심에는 싱가포르 정부가 있었고, 모든 국가정책의 목표는 외국기업 유치를 효과적으로 연출ㆍ기획하는 것이었다.
싱가포르 정부는 먼저 공무원들부터 최고의 엘리트 집단으로 만들었다. 나라 전체를 ‘허브 주식회사’로 만들기 위해서는 최고경영자(CEO)인 공무원들을 외국기업 유치 마케팅의 정예 전사로 키워야 했다.
지금도 학점이 우수한 대학생들을 미리 골라 공무원으로 발탁하고, 해외 경영대학원(MBA) 과정을 밟게 한다. 급여는 싱가포르 최고 수준을 보장하며, 외국기업을 유치할 때마다 성과급을 제공한다.
이 결과 싱가포르 공무원들은 비즈니스맨 이상의 비즈니스 감각을 가지고 됐고, 그 청렴성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개개인별 담당 업무와 연락처는 인터넷에 상세히 소개돼 있고, 이들이 내미는 명함에는 컬러사진까지 박혀 있다.
외국기업이 투자 문의를 해오면 주거 환경과 문화ㆍ레저 정보까지 제공하고, 활약이 돋보이는 외국기업들은 담당 공무원 재량으로 세제 등 각종 인센티브를 부여한다.
기업을 설립하는 데 드는 시간은 하루면 충분하고, 예상치 못한 숨겨진 비용(hidden cost)은 없다.
우리나라 모 은행의 싱가포르 지점장은 “한국과 싱가포르에서 모두 금융감독당국의 검사를 받아봤지만, 한국의 검사가 꼬투리를 잡기 위한 행정편의 위주라면, 싱가포르의 검사는 시스템과 리스크 관리가 핵심“이라며 싱가포르의 행정서비스를 높이 평가했다.
세계에서 가장 효율적이라는 창이 공항과 싱가포르 항만도 바로 이들 공무원들의 작품이다.
63개 항공사가 세계 139개 도시에 하루 평균 470회 서비스를 하는 창이 공항은 들어서면서부터 열대 식물과 연못이 가득한 ‘아시아의 정원’이다.
환승 고객들에게는 무료 시내투어와 수영장 등 여가시설이 제공되고, 비즈니스맨들을 위한 인터넷 센터도 갖춰져 있었다.
298개 국제 선사(船社)들이 123개국 600개 항구로 화물을 실어나르는 싱가포르 항은 보관ㆍ조립ㆍ무역ㆍ국제업무 등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는 130만평의 배후 관세자유지역을 운영하면서 세계 2위의 컨테이너 항만으로 발돋움했다.
한진해운 아태본부 엄태만(嚴泰晩) 영업팀장은 “다른 항만에서 하루종일 걸릴 것도 여기서는 몇시간이면 된다. 전화 한통 필요 없이 실시간으로 선적ㆍ하역 상황을 모니터로 확인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금융은 명시된 불법만 하지 않는 한 모든 게 자유롭다. 비즈니스가 있는 곳에 금융이 따라가는 것은 당연하지만 싱가포르는 1970년대말부터 역외금융시장을 조성, 해외에서 자금을 조달해 다시 해외를 상대로 한 금융활동까지 자유화 했다. 세계 4대 외환시장의 지위는 주어진 게 아니었다.
비즈니스 환경에 관한 한 싱가포르 외자유치 담당 공무원이나 이곳에 나와있는 외국기업 주재원들의 평가는 일맥상통하다.
“우리의 모토는 깨끗함과 쾌적함(clean and green)이다. 싱가포르의 허브 신화는 계속될 것이다.”(싱가포르 경제개발청(EDB) 세토 록 연(司徒鹿然) 부국장) “이곳에 온 지 3년째다. 굳이 한국으로 돌아갈 마음이 없다.”(플릿보스톤 파이낸셜 정현창 이사)
협찬: 한국원자력 문화재단 남동·중부·서부·남부·동서 발전㈜
싱가포르=유병률기자
bryu@hk.co.kr
■'허브 업그레이드' 한창…IT·BT·교육·예술 고부가 분야 눈돌려
동남아 허브로 군림해 온 싱가포르가 제2의 성장 엔진을 만들기 위해 새로운 실험을 하고 있다.
뒷마당인 동남아가 거함(巨艦) 중국에 밀려 기력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아시아 주요 도시들이 허브 경쟁에 뛰어들면서 외국기업 유치의 상대적 비용도 서서히 올라가고 있다.
아직 소수에 불과하지만 필립스ㆍBMW 등 다국적기업과 골드만삭스ㆍ리먼브러더스 등 세계적 투자은행들이 중국 사냥과 비용 절감을 위해 상하이(上海)와 홍콩 등으로 아시아 영업본부를 옮기고 있다.
세계 최대 선사(船社)인 머스크 시랜드(덴마크)는 30% 더 저렴한 요율 때문에 말레이시아 탄정 펠레파스로 기항지(起港地ㆍ동남아 화물의 집결지)를 옮겼고, 2위 에버그린(대만)은 올 8월 이전한다.
싱가포르 정부도 ‘비즈니스 천국’은 허브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님을, 배후 시장이 튼튼하지 못하고 비용 경쟁에서 뒤지기 시작하면 미래가 없음을 잘 알고 있다.
싱가포르 정부가 지난해 10월 경제재검토위원회(ERC)를 구성, 뽑아든 새로운 생존 전략 카드는 ‘허브의 업그레이드’, ‘허브의 고부가가치화’.
기존의 허브가 제조업을 기반한 물류ㆍ금융의 중심지였다면 미래의 허브는 문화ㆍ예술, 교육, 정보기술(IT), 생명공학(BT)의 국제 장터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허브를 지향하되, 콘텐츠를 첨단화하겠다는 얘기다.
미국 시카고대, 와튼스쿨, MIT, 존스홉킨스대 등의 분교를 유치, 외국기업 직원들은 물론 아시아 고급두뇌들을 불러 모으고 있는 것도 싱가포르를 ‘아시아의 캠퍼스’로 만들기 위한 전략의 일환이다.
아시아 최대의 예술ㆍ문화센터 ‘베이 오브 씨어터’를 건립중인 것도 싱가포르를 ‘아시아의 파리’로 격상시키기 위함이다. 또 세계 ITㆍBT 벤처기업의 천국을 만들기 위해 2,100만평 주롱산업단지에 ‘사이언스 파크’ ‘생의학 파크’를 조성하고, 국내외 마케팅에 착수했다.
최첨단 통신 설비에다 임대료는 무상에 가깝다. 그래도 이들이 만들어 낼 부가가치는 싱가포르의 것이지 달아나는 게 아니다.
물론 싱가포르의 이 같은 노력이 성공할 지는 미지수라는 분석도 있다. 예술과 ITㆍBT의 허브라는 게 창조와 혁신을 바탕으로 하는 것인데 싱가포르가 과연 그러한 토양을 갖추고 있느냐는 회의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창의력이 번뜩이는 사업가도 육성하지 못했고, 대부분 대기업은 국가가 대주주다. 초등학교 4학년이 되면 대학에 갈지, 고등학교에서 멈출지 까지 학교 당국이 정해주는, ‘패자부활전’이 없는 나라가 바로 싱가포르다.
정부가 중매회사를 세워 대졸은 대졸끼리, 고졸은 고졸끼리 짝짓기를 유도하는 그런 나라다.
그러나 싱가포르의 중앙은행인 싱가포르통화청(MAS) 남신 응 국장의 답변은 확신에 차 있다. “허브란 자본이든, 사람이든, 기술이든, 예술이든 빌릴 수 있는 것은 다 빌리는 것이다. 우리에겐 첨단 콘텐츠로 무장한 외국기업을 끌어들일 힘이 있다.”
유병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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