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한일월드컵이 시작된 지 열흘이 지났다. 개막전부터 이변이 연출된 이번 월드컵은 계속되는 파란과 이변속에 우승 후보들의 명암이 엇갈리며 날이 갈수록 더욱 더 흥미진진해지고 있다.우리나라는 첫 경기에서 폴란드에게 ‘역사적 승리’를 기록한 후 내친 김에 16강을 넘어 8강까지 가자는 열기가 뜨겁다.
월드컵이 시작되기 전에는 (일본에 비해) 월드컵 열기가 달아오르지 않는다고 걱정하는 언론 보도를 자주 볼 수 있었는데,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우리나라의 월드컵 열기는 예상보다 훨씬 더 뜨겁다. 평소에는 축구에 전혀 관심이 없던 사람도 ‘오프사이드’와 ‘페널티킥’에 대해 진지하게 물어보는 수준이 됐다.
그러나 우리가 폴란드를 이기고 온 국민이 그야말로 열광의 도가니에 빠져들었던 날에도 여러 외신 기자들이 “이렇게 ‘질서있는 무질서’는 본 적이 없다”고 평할 만큼 훌리건의 난동과 같은 불미스러운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바람직한 축구문화의 모델을 우리가 제시하고 있는 것 같아 흐뭇한 마음이다.
그래도 나는 한두 가지 걱정되는 점이 있다. 우리나라가 폴란드와 첫 경기를 가지던 날 부산월드컵경기장의 열기는 정말 상상 이상이었다.
그러나 폴란드 국가가 연주되는 도중에 우리 응원석에서 태극기를 펼치기 시작한 것은 너무나 아쉬웠다. 태극기가 펼쳐지는 것을 보고 관중들이 엄청난 함성을 토해내는 바람에 나중에는 폴란드 국가가 잘 들리지도 않았다. 이건 힘을 합해(?) 멋진 경기를 펼쳐야 할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미국이 포르투갈을 이긴 것은 경기전 미국 대통령이 포르투갈 대통령에게 압력을 가했기 때문이라는 썰렁한 유머가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것도 답답한 일이다. 정정당당한 경기를 통해 가려진 승부를 누가 이렇게 더럽힐 수가 있단 말인가?
내일 벌어질 미국과의 중요한 일전을 앞두고 몇몇 방송에서 동계올림픽 때 김동성이 억울하게 금메달을 놓친 ‘오노 사건’까지 들먹이며 전의를 불태우도록 선동하는 것도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한다.
일부에서는 축구경기를 응원하기 위해 모인 군중들을 이용하여 대규모 반미시위를 계획하고 있다고 하니 이쯤 되면 ‘열기’가 ‘광기’로 변질되지나 않을까 우려해야 할 판이다.
나는 우리 선수들이 미국과의 경기에서 통쾌하게 승리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 승리는 유치한 음모설이나 비뚤어진 반미주의와는 관계없이 우리 선수들이 그 동안 갈고 닦은 ‘축구 실력’으로 얻어낸 떳떳한 승리일 것이다.
/강석진 고등과학원 수리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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