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절 한때를 서해 해변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지낸 적이 있었습니다.읍에서 멀리 떨어진 그곳은 마을 버스에서 내려 한 시간 가까이 비탈진 오솔길을 걸어가야 하는 곳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수평선 위로 노을이 불타오르는 모습은 언제 보아도 질리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고 장엄했습니다.
흰 물줄기를 남기며 바다 저편으로 멀어져 가는 통통배나 썰물진 해변의 김 양식장 사이를 오가는 경운기를 마치 전생의 한 순간을 추억하는 심정으로 내려다보곤 했습니다.
명절날 어둠을 헤치고 근처의 인가에서 얻어온 차디찬 떡 부스러기나 과일 조각을 우물거리다 보면 시린 파도소리가 척추를 타고 올라오다 목젖 부근에서 포말을 흩날리며 부서지곤 했습니다.
그곳에서 나는 완전히 혼자였습니다. 물론 내 곁엔 끊임없이 뭔가를 지시하고 명령하는 목소리들이 있었지만 그것은 나의 진정한 실존과는 상관없이 스쳐 지나가는 소음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간혹 절친한 친구나 선배로부터 나 아직 살아 있다, 너도 부디 살아 있어라, 라는 엽서가 날아올 뿐 세상은 고요했고 잠잠했습니다.
거기선 혁명도 예술도 진리도 다 아득히 먼 나라의 풍문일 따름이었습니다.
일주일이나 사나흘이 지나서야 비로소 도착하는 신문을 펼쳐보면 세상은 여전히 시끄럽고 혼탁했지만 신문을 접는 순간 모두 거짓말처럼 사라졌습니다.
간혹 모포를 뒤집어쓰고 누워 군용천막을 두드리는 빗소리나 숲에서 들려오는 새 울음소리를 들으며 도대체 문학이라는 게 뭔가 생각해보곤 했습니다.
내가 그토록 열망했으며 내 가슴을 거세게 뛰게 만들었던 그 언어의 섬광이라는 게 이런 작은 공간의 이동만으로 이처럼 아득하게 여겨지는 이유가 뭘까 상념에 젖곤 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때 나는 성년이 된 후 처음으로 ‘문학이 없는 세계’에 던져진 것이었습니다.
문학이 없어도, 시나 소설 비평 따위가 존재하지 않아도 세상은 너무나 잘 돌아갔고 빈틈없이 유지되었으며 심지어 아름답기까지 했습니다.
문학이 없어서 괴롭거나 뭔가 허전한 것은 그 세계에선 나 혼자뿐이었습니다.
그 시절을 통과하며 나는 비로소 누구에게나 다 문학이 필요한 것은 아니며 문학 때문에 죽고 못 사는 사람은 문학에 중독된 사람일 뿐이라는, 어떻게 보면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나를 포함해서 상당수 사람들은 왜 문학에 자발적으로 중독돼서 그것이 주는 일순간의 쾌락과 장기간의 금단의 고통을 영속화하려고 하는 걸까요.
도대체 “문학이 무엇이관대” 오늘도 시인 작가들은 백지를 앞에 두고 밤을 지새며 자기 자신과의 피 말리는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문학이 없는 세계’를 지나 ‘문학이 전부인 듯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나는 요즘 불현듯 예전의 그 경험과는 다른 의미에서 문학이 없는 세계를 꿈꾸곤 합니다.
너무도 많은 책에 둘러싸여 지내는 나머지 때로 책이 하나도 없는 텅 빈 방이 그리워지기도 하듯 문학에 치여 살다 보니 때로 문학, 나아가 문자가 없는 단순하고 정갈한 어떤 공간에 대한 막연한 향수가 찾아오기도 하는가 봅니다.
진화의 단계에서 볼 때 인간이란 책 읽는 원숭이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늙도록 책을 쓰고 책을 읽는 원숭이가 있습니다.
나 또한 그렇게 살다 갈 것입니다. 한편으로 문학을 동경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문학이 없는 세계를 꿈꾸며.
팔봉비평문학상을 주관하는 한국일보사와 부족한 글에서 좋은 점을 발견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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