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경제 지도에 지각변동의 기운이 일고 있다. 세계 경제를 장악하던 미국 경제의 리더십이 떨어지면서 세계 경제 체제가 재편될 움직임이다.가장 큰 징후는 세계 금융 시장에서 포착되고 있다. 미국 시장으로 집중되던 국제 자본의 이탈 현상이 가속화하면서 세계화를 이끌던 강한 달러가 흔들리고 있다.
■ 세계경제 재편 움직임
2000년 한 해 미국에 몰린 1조 달러에 이르는 국제 자본은 지난해 8,000억 달러 대로 줄어든 데 이어 올해에는 감소 폭이 더욱 커지고 있다.
올들어 2개월 간 미국의 국제자본 유입은 110억 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 330억 달러의 3분의 1에 그쳤다.
이 영향으로 5월 31일 미국 외환시장에서 엔ㆍ달러 환율은 6개월 만에 최저치인 122.8엔까지 추락했다. 달러는 유로화에 대해서도 16개월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달러는 미국 경제의 매력과 에너지를 이야기한다. 달러 가치 하락은 미국 경제의 역동성이 힘을 잃어가고 있음을 반증해 주는 것이다. 달러의 몰락이 어떤 테러보다 무서운 재앙이 될 것이라는 우려가 확산되는 분위기다.
돈이 갈 곳은 아시아밖에 없다
그 많던 달러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국제 자본은 아시아를 주시하고 있다.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는 지난달 30일 “그래도 돈이 갈 곳은 아시아밖에 없다”고 보도했다.
과대평가된 미국의 기술주들에 대한 미련을 버린 국제 투자가들이 아시아 신흥 시장에 눈길을 돌리고 있다는 분석이다. 도이체방크는 신흥 시장 중 최고의 투자처로 중국 대만 한국을 꼽았다.
세계 320개 민간은행 등으로 구성된 국제금융협회는 올해 한국과 중국 등 신흥 시장으로 유입되는 주식 투자자금은 213억 달러로 지난해의 2.2배에 달할 것으로 예상했다.
왜 다시 아시아인가. 아시아 경제의 다이내믹한 미래를 보기 때문이다. 블룸버그 통신은 지난해 사상 최악의 경기 침체를 겪었던 대만 싱가포르 일본 등 아시아 국가들의 경제가 다시 살아나고 있다고 최근 보도했다. 지난해 4ㆍ4분기 마이너스 1.87%를 기록했던 대만의 경제성장률은 올 1ㆍ4분기 0.89%로 반전됐다.
싱가포르 경제도 바닥에서 탈출하고 있다. 마이너스 6.6%까지 떨어졌던 성장률은 수출 호조에 힘입어 1ㆍ4분기에 마이너스 1.7%로 힘찬 반등을 보였다.
일본도 경기회복의 바로미터인 1ㆍ4분기 제조업 가동률이 6분기 만에 상승세를 기록하는 등 ‘잃어버린 10년’을 되찾기 위해 공장 라인을 풀가동하고 있다.
이를 반영해 국제통화기금(IMF)은 우리나라의 경제성장 전망을 5.75%까지 내다보는 등 아시아 국가들의 성장 전망치를 조만간 상향 조정할 것으로 예상된다.
왜 다시 아시아인가
경제 전문가들은 아시아 경제의 회복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전개된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아시아 경제는 미국 경제의 종속 변수일 수밖에 없었다. 미국에 대한 지나친 수출의존도 탓이다.
사정은 달라졌다. 미국 경제와 뉴욕 증시의 기죽은 모습에도 불구하고 아시아 경제와 증시는 탄력있는 흐름을 이어가고 있다.
스탠더드 차터드 뱅크의 수석이코노미스트 제러드 라이언스는 “아시아 경제를 미국의 틀에서 파악하는 것은 더 이상 정확하지 않다”면서 “특히 동아시아 국가들은 세계 경제의 일부로서가 아니라 독자적인 발전 궤도를 그리고 있다”고 강조했다.
우리나라 증시가 뉴욕 증시는 물론 세계 경제 전반의 선행지표로 각광받으면서 월스트리트가 서울 증시를 체크하느라 밤잠을 설칠 정도가 됐다.
아시아 경제의 회복은 수출 대신 내수 확대를 견인차로 삼는 새로운 성장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이에 대해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최근 호에서 급격한 출산율 저하로 부양 부담이 줄어든 베이비붐 세대들이 활발한 경제 활동과 소비 지출로 내수성장을 뒷받침하는 등 동아시아 국가들이 인구통계학의 선물을 바탕으로 경기회복에 나서고 있다고 분석했다.
아시아 경제에는 또 하나의 중대 변수가 생겼다. 중국이 아시아 경제의 새로운 성장 엔진으로 부상하고 있는 점이다. 4월 싱가포르의 대중국 수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69% 증가한 데 비해 대미 수출은 1.2%에 그쳤다.
1ㆍ4분기 우리나라의 대중국 수출도 5% 증가한 반면 대미, 대유럽연합(EU) 수출은 각각 7%, 11% 하락했다. 중국의 등장은 아시아 경제의 패러다임에 일대 전환을 가져오고 있다.
1960~90년대 아시아는 선진국 일본을 길잡이로 후발국들이 기러기떼처럼 줄지어 미국 주도의 세계화를 허겁지겁 좇아갔다.
그러나 21세기에는 최대 시장인 중국의 경제력을 발판 삼아 분업이 가능한 아시아 국가들이 동등하게 독자적인 경제권을 형성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고 있다. 이에 따라 아시아 경제의 블록화와 단일 통화 등 아시아 경제 통합 논의에 불이 붙었다.
희망은 아시아 경제의 내부에서 나온다. 아시아 경제의 재도약은 외환 위기의 시련에서 싹이 텄다. 외환위기 당시 아시아에 쏟아졌던 기업의 부실 회계와 후진 금융 등의 화살은 부메랑처럼 미국을 향하고 있다.
국제 투자자들은 불법 회계로 얼룩진 엔론 사태에 환멸을 느낀 나머지 달러를 내다팔고 있다. 이코노미스트는 ‘주식회사 미국’의 정직성이 뿌리채 흔들리면서 미국식 자본주의 모델이 위기를 맞고 있다고 전했다.
이를 비웃듯 아시안월스트리트저널은 최근 크레디리요네증권의 분석 결과를 인용, 아시아 기업들의 회계 관행이 미국 기업보다 더 투명하다고 보도했다.
아시아 경제의 재부상은 글로벌 스탠더드에 자리를 내줬던 아시아적 가치를 다시 돌아보게 한다.
연고주의와 재벌체제 등 부정적인 면모는 일신하는 대신 높은 교육열과 공동의 목표를 우선하는 미덕, 유교적 전통의 근검절약, 저축을 통한 투자 등 아시아적 가치의 장점이 아시아에 들끓는 경제 에너지를 제공할 것이라는 기대감이다.
김병주기자
bjkim@hk.co.kr
■경제블록화 앞날은
최근 들어 동아시아를 보는 세계의 눈은 이 지역 경제의 블록화 움직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처럼 단순 협력 차원이 아니라 19억 인구, 6조 5,000억 달러에 이르는 내수 시장의 저력을 지닌 지역 각국 사이에서 관세 철폐 등 실질적인 무역 자유화를 달성하려는 움직임들이 어느 때보다 활발하기 때문이다.
현재 대표적인 이 지역 경제공동체는 동남아시아 10개 회원국이 모여 1993년 창설한 동남아자유무역지대(AFTA)다.
AFTA는 회원국끼리의 무역자유화 추진은 물론 최근 호주 뉴질랜드 사이의 자유무역협정인 CER과 연계도 모색하고 있다. 하지만 이보다 더 큰 위력은 현재 다각적으로 모색되는 쌍무 또는 3자간 FTA 체결 움직임에 잠재해 있다.
2000년을 전후해 일본-한국, 한국-중국-일본 등 동북아 3국, 동남아국가연합(ASEAN)-중국, 싱가포르-인도, 일본-싱가포르가 FTA를 연구, 제안하거나 협상을 진행 중이다.
특히 최근 동아시아 경제 결속의 큰 흐름은 전통적인 경제 대국 일본과 차기 세계 경제의 맹주로 떠오르는 중국이 주도권을 잡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해 11월 17억 인구를 아우르는 통합시장을 구축하기 위해 10년 안에 FTA를 출범키로 합의한 중국과 아세안은 최근 올해 말까지 FTA 창설 협정의 기본틀을 완성키로 했다. 창설을 완료하면 중국-아세안 무역지대는 유럽연합(EU)과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못지않은 거대 경제 공동체가 된다.
이미 아시아 주요국은 물론 태평양 주변국들과 다각적인 FTA 협상을 벌이고 있는 일본은 이 같은 개별 경제 공동체를 아우르며 동아시아 각국을 포괄하는 '동아시아 자유 무역권' 구상을 추진한다는 방침이다.
한국 중국 일본과 아세안을 연결해 무역 장벽을 폐지하고 경제 제도를 통일해 효율적인 국제 분업을 달성하려는 목표다.
경제학자 출신인 글로리아 아로요 필리핀 대통령이 최근 일본 방문에서 밝힌 것처럼 향후 이 지역 통화를 바스켓 형태로 묶는 EU 형태의 통화 통합까지 이루어질 경우 동아시아 경제는 사실상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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