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는 물류 주식회사"네덜란드는 더 이상 튤립과 풍차의 나라가 아니다. 바다를 땅으로 바꾼 간척의 대역사도 이젠 신화로 남아있을 뿐이다. 새로운 거대 단일시장이 된 유럽에서 네덜란드의 새로운 수식어는 물류중심국가, 즉 ‘허브(hub)’다.
유럽의 젖줄 라인강이 북해와 만나는 항도(港都) 로테르담. 도시 전체가 거대한 부두나 다름없다. 항만 길이만 총 50㎞.
항구 옆 도로를 자동차로 1시간이나 달려도 눈에 들어오는 것은 거대 화물선들과 초대형 철골 크레인, 컨테이너 더미와 그 사이를 분주히 오가는 열차와 트럭들, 그리고 일련번호가 이미 9,000을 넘어선 물류창고들 뿐이다.
로테르담은 유럽 물동량의 40%이상이 거쳐가는 대표적 ‘허브항’이다. 지난해 이 곳을 통해 들고, 나간 화물은 총 3억1,460만톤. 세계 최대다. 부산항의 3배를 웃돌고, 싱가포르보다도 30%나 많다.
컨테이너 화물도 유럽내 최대인 610만개(TEU 기준)가 처리됐다. 독일 함부르크, 벨기에 안트워프, 프랑스의 르 하버 등 대형 항구들이 도전장을 내밀고 있지만 유럽의 제1관문은 역시 로테르담이다.
로테르담은 천혜의 항구다. 이탈리아에서 스칸디나비아, 러시아에서 아일랜드까지 3억5,000만 인구의 유럽시장에서 심장부에 자리잡고 있다.
깊은 수심(17m)덕에 어떤 대형선박도 접안할 수 있고, 라인강(네덜란드어로는 마스강) 내륙수로를 통해 동유럽까지도 수송이 이뤄진다.
하지만 로테르담을 허브항으로 만든 것은 ‘타고 난 것’ 위에 구축된 인프라다. 첫째는 육ㆍ철ㆍ수로가 교차하는 완벽한 교통망이다. 항구로 반입된 화물은 5개 간선도로망을 통해 유럽 전역으로 48시간내 트럭수송이 가능하다.
열차화물도 4개 철도노선을 거쳐 550개 터미널로 배송된다. 내륙운하는 8개국 26개 항구로 연결돼 매년 14만척의 화물선이 물건을 실어나르고 있다.
둘째, 대규모 물류ㆍ유통단지다. 충분한 창고ㆍ보관시설이 없다면 아무리 항만입지가 좋아도 물자는 유입될 수 없다.
로테르담항 배후에 조성된 총 250㏊ 규모의 광활한 유통단지(디스트리파크)에는 세계 각국의 창고시설이 들어서 있다.
셋째는 부두운영의 선진화다. 로테르담항은 하역-이동-적재-배송에 이르는 전 과정이 전산화되어 있다. 적체도 지연도 없다.
로테르담 항만진흥협회의 판 헤이즌 담당관은 “부두가 배를 기다려야지 배가 부두를 기다려서는 안된다는 것이 항만운영의 기본 원칙”이라고 말했다.
로테르담의 성공이 없었다면 ‘허브 네덜란드’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항구만 허브가 아니라, 네덜란드는 국가 전체가 허브다.
유럽에 진출한 미국과 아시아 기업중 각각 57%, 56%가 네덜란드에 유통센터를 두고 있을 만큼, 네덜란드는 그 자체가 거대한 물류단지인 것이다.
삼성전자도 구주총괄본부는 영국 런던에 위치하고 있지만, 물류본부는 네덜란드에 두고 있다. 노키아 에릭슨 등 세계적 통신브랜드의 휴대폰을 비롯, 모니터 TV 등 삼성전자의 대부분 제품들은 네덜란드를 통해 유럽 전역으로 배송되고 있다.
삼성전자 현지법인 김진환 부장은 네덜란드의 강점에 대해 “인프라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이들의 외국어 구사능력이다. 고등학교만 졸업해도 2~3개국어는 가능하기 때문에 다국적 비즈니스에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사실 외국어 소통능력은 ‘허브 네덜란드’를 가능케 한 핵심 원동력의 하나다. 허브란 사람과 물자가 모여드는 곳이고, 사람과 물자의 중심지가 되려면 언어소통이 자유로워야 하기 때문이다.
유로지역통계에 따르면 네덜란드 국민의 73%는 적어도 한가지 이상의 외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2개국어 및 3개국어 사용가능인구도 각각 44%, 12%나 된다. 유럽국가 가운데 단연 최고수준이다.
언어가 자유롭다는 것은 사회 분위기가 그만큼 대외개방적이란 뜻이다. IMD의 국가문화의 개방성 평가에서 네덜란드는 유럽 주요국중 최고점을 받았다.
항만과 공항, 물류시설이 허브를 만든 유형의 인프라라면, 막힘없는 의사소통과 대외적 유연성이야말로 무형의 필요조건인 셈이다.
1987년 맥킨지 보고서 권고에 따라 ‘물류중심국가’를 미래생존방향으로 설정한 이래, 네덜란드는 국가차원에서 인프라구축, 외자기업유치, 산업ㆍ물류단지조성 등 허브 전략을 추진해왔다.
‘허브 네덜란드’는 항만과 공항 뿐 아니라, 정부 기업 국민 제도 및 사회정서까지 ‘허브화’함으로써 비로서 가능했던 것이다.
로테르담=이성철기자
sclee@hk.co.kr
■ 완벽한 행정서비스
‘허브’는 기업하기 좋은 토양에서만 결실을 거둘 수 있다. 특히 외국기업의 유치는 허브의 전제조건이다.
네덜란드의 성공 뒤에는 투자유치를 위한 정부 및 관련단체의 완벽한 지원시스템과 상상을 초월하는 행정서비스 마인드가 있었다. 특히 투자유치와 기업지원을 위한 서비스정신은 일선 행정을 담당하는 지방자치단체에서 두드러진다.
로테르담항에 대형물류센터를 갖고 있는 한국타이어의 진출 당시 경험은 네덜란드가 왜 허브가 될 수 있었는지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한국타이어 최중락 구주본부장는 이렇게 얘기했다. “1990년대 중반 유럽내 물류시설 확보를 위해 시장조사를 벌이고 있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네덜란드 국제유통협회(HIDC)로부터 도와줄 것이 없느냐는 전화가 왔습니다. 그래서 창고시설을 찾고 있다는 얘기를 했더니 3번이나 직접 찾아와 6개 후보지역을 제시하며 자세하게 브리핑을 해주더군요.”
HIDC는 투자기업에 물류정보와 컨설팅 등을 무상 제공하는 비영리단체다.
이어 네덜란드 투자청(NFIA), 로테르담시청, 로테르담 항만청 등 행정기관 관계자들이 잇따라 찾아왔다. 이들은 시공회사선정, 건축비산정, 융자금알선까지 물류시설 설치에 관한 모든 사항을 도맡아 처리해줬다.
특히 로테르담 시청측은 몇 명 되지 않는 한국타이어 직원들의 출퇴근을 위해 하루 3차례 버스운행까지 약속했고, 심지어 소방당국이 지나치게 엄격한 소방시설을 요구하자 회사를 대신해 소방당국에 ‘항의’, 결국 기준완화까지 얻어내줬다.
경제분석기관인 EIU 조사에서 네덜란드는 캐나다 미국 영국 스위스 등을 제치고 향후 5년간(2002~6년) 기업들이 가장 투자하고 싶은 국가로 꼽힌 바 있다.
/로테르담=이성철기자
■ 유럽의 허브 공항
바다에 로테르담이 있다면 하늘엔 스키폴이 있다. 암스테르담 서남쪽 20㎞에 위치한 스키폴 공항은 전세계 97개국, 248개 지점으로 87개의 정기노선이 운행되고 있는 유럽의 대표적 허브 공항이다.
스키폴 공항은 지난해 4,000만명의 여행객과 120만톤의 화물을 수송, 런던 히드로공항-프랑크푸르트 마인 공항-파리 샤를 드골 공항에 이어 유럽내 4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허브공항으로서 스키폴의 경쟁력은 공항 자체 보다 주변지역에 개발된 산업ㆍ물류단지에서 나온다. ‘AAA(Amsterdam Airport Area)’로 불리우는 이 단지에는 현재 IBM, 마이크로 소프트, 노텔, 시스코 시스템즈, 유니시스, 캐논, 니콘, 미쓰비시자동차, 르노 등 세계적 기업들의 유럽본부나 연구소, 물류시설 등이 자리잡고 있다.
600㏊에 달하는 광활한 초지를 첨단 비즈니스 파크로 변모시켜 글로벌 기업들을 끌어들인 것은 스키폴지역개발공사(SACD)다.
암스테르담시와 스키폴공항을 비롯한 민ㆍ관이 공동투자한 SADC는 외국기업 유치를 위해 교통 통신 위락시설 등 최적의 인프라를 구축하면서 세계를 순회하는 로드쇼까지 벌이고 있다.
SADC는 입주의향이 있는 기업에겐 각종 행정업무대행은 물론 직원채용, 주택알선까지 필요한 모든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로테르담항이 대규모 배후물류단지를 확보함으로써 허브항만의 위력을 발휘한 것 처럼, 스키폴공항 역시 공항규모가 커서가 아니라 사람과 물자가 몰릴 수 있도록 기업과 자본과 물류시설이 인접지역에 집적됐기 때문에 허브공항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빌렘 트롬멜스 SACD 사장은 “현재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스키폴 공항과 로테르담항구간 고속도로가 완성되면 도로 주변지역에 대단위 산업ㆍ물류벨트를 구축할 계획”이라며 “이렇게 되면 두 허브 관문의 시너지 효과는 더욱 극대화될 것이고 이를 위해 스키폴과 로테르담은 공동 마케팅 등 공조방안을 모색하고 있다”고 말했다.
암스테르담=이성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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