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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보 창간48주년 특집 / 한국, 아시아영화 '큰손'으로 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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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보 창간48주년 특집 / 한국, 아시아영화 '큰손'으로 부상

입력
2002.06.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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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배급 전문사 미로비전의 채희승 대표는 일본의 호러 영화감독 구로자와 기요시(黑澤淸)를 만나기 위해 최근 2년간 도쿄를 10차례도 더 방문했다.지난해 칸 영화제에서 비평가상을 수상한 ‘회로’ ‘큐어(1997)’ 등 그의 작품은 비평가와 관객을 모두 만족시키는 흔치 않은 호러 영화. 일본은 물론 프랑스의 와일드 번치, 미국의 미라맥스 등 제작사들이 그의 작품에 투자하기 위해 부지런히 접촉했다.

그러나 결국 그의 차기작 ‘숲’은 미로비전이 100% 투자를 맡기로 결정됐다. 9월 캐스팅을 마치고, 12월쯤 촬영에 들어간다. 우리 돈, 일본 감독, 일본과 한국 공동 스태프.

최근 수년새 아시아의 문화 수출국으로 강한 드라이브를 걸어온 한국 대중 문화가 질적 도약을 모색하고 있다.

한국의 가요, 방송, 영화로 견인되어온 ‘한류(韓流)’의 바람은 지속될 가능성이 크지만 문제점도 적잖은 게 사실. 그러나 최근 한국은 콘텐츠 수출을 넘어 직접 투자국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올 칸의 본선에 진출한 이픽쳐스(대표 폴 리)의 ‘미지의 기쁨’(감독 지아장커)이나 ‘주목할만한 시선’에 초청된 미로비전의 ‘크라이 우먼’(감독 뤼빙지엔)은 한국 영화가 직접 투자를 시작해 결실을 맺은 첫 작품.

두 영화사 모두 두 감독의 차기작을 제작키로 확정하는 한편, 중국 미국 일본 등 다국적의 감독들과 제작을 협의중이다. 구체적 내용을 밝히기를 꺼려 하는 프로젝트는 대략 7, 8건.

영화사 봄(대표 오정완)도 한국의 김지운 감독, 태국 논지 니미부트르, 홍콩 진가신 등 세 감독의 옴니버스 영화 ‘쓰리’에 투자, 개봉을 앞두고 있다.

미로비전 채희승 대표가 직접 투자에 나서게 된 것은 한국 영화의 수출에는 한계가 명확했기 때문. “한국에서 수 십억원을 투자하고, 몇 백만명이 든 영화도 해외에 판매할 때는 몇 만달러가 고작이다.

그러나 일본, 중국의 감독 영화는 기본 가격이 두 배 이상이다. 물론 직접 투자의 기초는 영화 수출의 노하우.

“지난해 로카르노, 토론토 영화제 등에 초청 받은 ‘강령’이라는 작품의 해외배급을 대행하게 되면서 감독에게 차기작을 함께 하자고 졸랐다.”

국내의 급등하는 제작 단가도 해외 투자에 눈길을 돌리게 하는 요인이다. 일본에서 300~400개의 극장에서 개봉을 하는 구로자와 감독의 경우 새 영화의 제작비는 200만달러(24억원). 중국 감독은 더 낮은 편이어서 50~60만 달러면 해외 영화제에 출품할 만한 퀄리티의 작품을 만들어낸다.

영상 산업에 몰려든 풍부한 자금력은 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하다는 점에서 ‘한국의 아시아 영화기지’는 허풍이 아니다.

MBC 프로덕션의 최종수대표는 “중국, 홍콩 등의 영화감독 20여명이 시나리오를 보내와 투자를 의뢰하고 있다”고 밝혔다.

삼성벤처투자의 관계자도 “요즘 아시아의 작가주의 감독들 사이에서는 한국에서 자금을 펀딩받아 영화를 제작하려는 이들이 상당하다”고 전했다.

당국의 허가를 받지 않은 이른바 ‘지하영화’를 만드는 중국의 6세대 감독들은 한국의 영화자금을 갈망하는 1순위. 일본, 프랑스와 함께 지아장커의 ‘미지의 기쁨’을 공동제작한 이픽쳐스는 현재 또 다른 중국 국적의 감독과 시나리오를 다듬고 있다.

이픽쳐스 관계자는 “중국 영화의 경우 해외 영화제에서 이미 충분한 주목을 받고 있지만 스튜디오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지 않아 외부에서 영화 자금을 모으려는 감독이 많다"고 말한다.

미로비전은 미국 상업 영화감독의 작품에 직접 투자를 준비중이고, 앞으로 몇 건의 대형 프로젝트를 발표할 예정이다.

개별 영화사가 해외 직접 투자에 과감히 나서게 된 데는 부산국제영화제의 일종의 마켓인 ‘부산 프로모션 플랜(PPP)’의 역할이 토대가 됐다.

1998년부터 시작한 PPP는 80여편의 중국 일본 홍콩 베트남 태국 등 작가주의 감독의 영화를 국내외 영화자본과 엮어주는 ‘중매자’ 역할을 해왔다. 때문에 아시아 영화 투자의 ‘창구’ 역할을 해온 한국이 아시아 영화 투자ㆍ배급의 ‘허브’(기둥)가 될 가능성은 꽤 높다.

‘취화선’의 칸 영화제 수상으로 국제영화제에서의 위상이 높아지고, 국내 영화 자본이 급팽창한 지금이 이런 강공 드라이브를 밀어부치기에는 적기라는 게 전문가들의 한결 같은 지적이다.

박은주기자

jupe@hk.co.kr

■이픽쳐스 '폴 리' 대표

이픽쳐스 대표 폴 리(37)는 한국이 외국에 직접 투자, 영화를 만드는 일을 아직은 “적과의 동침”이라고 표현했다.

각국마다 민감한 문화차이가 있고, 잇속이 다르지만 결국은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하나의 명분으로 통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픽쳐스는 ‘공동경비구역 JSA’ 을 제작한 명필름이 해외 진출을 위해 지난해 4월 설립한 자회사. 한국 영화 수출은 물론 외국 감독을 스카우트해 영화를 제작하는 국제화 전진기지이고, 폴 리는 국제 영화계 인사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한 그 수장이다.

폴 리 대표는 “아시아 각국에서 영화 제작비 규모가 커지고 있기 때문에 영화 제작업의 위험비중이 증가하고 있다.

각국에서 투자 위험을 줄이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며 아시아는 아시아끼리, 유럽은 유럽내에서 합작 하는 방식으로 직접 투자를 전개하는 방식이 유리하다고 지적했다. 지역적 연고가 있을 경우 판권 판매나 대대적인 동시 배급이 훨씬 수월하기 때문이다.

칸 영화제 ‘특별한 언급’에 진출한 지아장커의 ‘미지의 기쁨’은 폴 리가 평소 쌓아두었던 인적 네트워크가 위력을 발휘했던 케이스.

1회 부산프로모션플랜(PPP)에서 기타노 다케시가 세운 영화사 ‘오피스 기타노’가 투자를 의뢰했던 작품이 지아장커의 두번째 영화 ‘플랫폼’. PPP의 코디네이터로 활동하던 폴 리가 ‘오피스 기타노’ 측과 인연을 맺게 됐고, 이픽쳐스가 설립됐다는 소식을 들은 회사가 지아장커의 ‘미지의 기쁨’ 시나리오를 보내왔다.

폴 리는 “해외 투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감독을 선택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사업 파트너를 구하느냐가 관건”이라고 말한다.

기획, 시나리오, 프로덕션, 포스트 프로덕션은 물론 마지막 마케팅과 세일즈까지 함께 해야 하는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파트너에 대한 신뢰라는 것이다. 그를 이런 관계를 ‘동침’이라고 표현했다.

폴 리는 “아시아에서 영화적 잠재력이 가장 큰 나라가 한국이다. 더욱이 한국의 영화 자본이 비교적 충분한 편인데 반해 일본, 홍콩, 중국 등 아시아 나머지 지역의 영화 산업이 우리보다는 부진한 편이라 각국의 투자 요청이 쇄도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폴 리는 15~26일 칸 영화제 필름마켓의 해외 세일즈 부분에서도 짭짤한 성과를 올렸다. ‘후아유’ ‘욕망’ ‘낙타(들)’등 개봉 영화는 물론 현재 촬영중인 ‘YMCA 야구단’, 기획단계인 ‘왕조의 눈’을 사전판매했다.

서울서 태어난 폴 리는 가족을 따라 7세에 미 샌프란시스코로 이민, 버클리대 철학과를 졸업한 후 영화 제작 및 단편, 다큐멘터리 감독을 거쳐 샌프란시스코 아시아 미국 영화 페스티벌의 디렉터로 활동했다.

부산국제 영화제 요청으로 PPP의 코디네이터로 한국과 인연을 맺어 그간 베니스, 베를린 영화제, AFMA(아메리칸 필름 마켓) 등 한국 영화가 가는 곳에는 늘 그가 따라 붙어 해외진출을 거들어 왔다. 한국 영화의 입과 손과 같은 인물이다.

/박은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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