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가 창간 48주년 기념으로 실시한 한국인 정치ㆍ사회의식 여론조사의 가장 큰 수확은 한국 사회의 이념 분포가 대북 인식과 ‘기본권’ 인식, 경제 인식 등 다양한 차원을 갖고 있음을 확인한 것이다.더욱이 성장과 분배를 둘러싼 경제 인식의 차이가 스스로의 이념 성향에 대한 주관적 평가에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결과는 서구와는 크게 다른 ‘한국적’ 진보-보수의 틀을 적용하지 않고서는 현재 우리 사회에 움트고 있는 이념 갈등의 실상에 접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시사하는 것이다.
산업화 과정의 갈등을 중심으로 태어난 서구의 이념은 다양한 구성 요인이 결국에는 경제 인식의 진보-보수 축에 중첩, 수(數)직선상의 분포로 나타난다.
그동안 한국에도 서구 사회와 마찬가지로 폭 넓은 이념적 분화가 존재하기 때문에 1차원적 유형화가 가능한 것으로 여겨져 왔다.
실제로 그 동안의 각종 정치ㆍ사회 의식 조사에서 스스로의 이념에 대한 주관적 평가(인식)는 중심축이 다소 좌우 한 쪽으로 기울더라도 비교적 양쪽으로 고르게 퍼진 이념 분포를 드러냈다.
그러나 이번 조사에서 이런 주관적 이념 인식의 내용을 살펴 보기 위한 요인분석을 행한 결과 국가보안법 개폐(설문 2), 공공기관 파업(설문 7), 호주ㆍ호적제 개폐(설문 8) 문제가 강하게 결합한‘기본권’ 인식이라는 요인과 대북 요인이 새로 발견됐다.
이는 한국인의 이념 성향이 대북 인식(설문 1,3)과 기본권 인식, 경제 인식(설문 5,6) 등 복합적 요소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을 보여 주었다.
더욱이 이 세 요인을 주관적 이념 평가(설문 14)에 걸어 본 다중 회귀분석 결과 경제 인식이 별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기본권 인식과 대북 인식을 양축으로 ‘한국적’ 이념 분포를 그려 낼 가능성을 제시했다.
기본권 및 대북 인식은 독립변수로서 영향력이 강한 출신 지역과 연령 요인을 배제해도 주관적 이념 판단과 강한 연관성을 가지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래프 보는법
꺾은 선 그래프의 가로·세로축은 주관적 이념 평가와 대북,기본권,경제 인식등과의 상응관계를 나타낸다.가로축은 스스로의 이념성향 평가 척도이며 세로축은 각 영역에서의 실제 이념성향이다.대북 및 기본권이식에서는 주관적 이념판단과 실제 이념성향이 대체로 비례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으나 경제인식에서는 일정한 패턴이 나타나지 않는다.
황영식기자
yshwang@hk.co.kr
■교수단 조사결과 분석
이념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다. 가치관의 혼돈을 불러 일으키는 모순이 있고, 내 편, 네 편을 갈라 놓는 갈등이 있지 않고서는 이념이 태어날 수 없다.
이념은 모순을 해소하고 갈등을 줄이려는 인간 노력의 총 결산체이기 때문이다. 모순이 없고 갈등이 없다면 인간이 이념을 만들어 낼 까닭이 없다.
그래서 이념은 역사성을 가진다고 하는 것이다. 시대의 모순에 대한 인간의 고민이 그 안에 배어 있고 갈등에 대한 진단 및 처방이 그 속에 숨어 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우리 식자층은 한국이 아니라 서구의 역사 속에서 만들어 진 이념적 잣대에 한국을 끼워 맞추려는 타성에 젖어 왔다.
성장의 편에 서면 보수이고 분배의 편에 서면 진보라는 계급 중심의 서구식 경제적 이념관이 우리 지식인 사회에 팽배하다.
이런 서구 모방형 이념관은 선거 때마다 ‘계급’이 표의 향방을 결정하지 못하는 상황에서조차 흔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식자층의 상당수는 서구식 이념관에 맞아 떨어지지 않는 한국의 현실을 탓하기만 한다.
한국인은 여전히 전근대적 사고의 틀을 벗어 던지지 못하고 있다는 진단을 내놓는 것이다.
더 이상 서구의 이념적 틀에 한국을 끼워 맞추려 하지 말아야 한다.
이제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경험할 수밖에 없었던 한국의 역사적 사건에 초점을 맞추고 그 이념적 의미를 한국인의 관점에서 살필 때이다. 그 의미를 알게 되면 현재 한국의 이념적 지형이 보이기 때문이다.
현대 한국 정치사에서 그런 충격적 사건이 두 번 있었다. 반공을 국시의 자리에 올려 놓은 한국전쟁이 그 하나이고 기본권 신장의 편에 서서 독재에 저항하는 민중 이념을 낳은 광주사태가 다른 하나이다.
그 시대를 거친 대중은 ‘거리’에서 몸서리치는 폭력을 목격하면서 반공의 당위성을 배우고 기본권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역사가 이념을 가르친 선생인 것이다.
이런 이념은 강의실에서 들을 수 있는 지식인의 서구적 관념보다 훨씬 더 강한 설득력을 갖는다. 대중 자신이 삶의 현장에서 체험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대중적 설득력은 북한이 강력히 버티고 독재정권이 건재하는 한 지속된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탈냉전 시대에 들어 서고, 북한이 기아선상에 허덕이면서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양화하고 있다.
북한은 우리의 주적이라는 기존 해석 곁에 그 체제는 화해의 대상이라는 신사고가 싹튼다. 독재의 그늘이 하나하나 걷히면서 민주화의 의미에 대한 국민적 컨센서스 역시 깨지고 있다.
이제는 심각한 기본권 침해가 존재하지 않을 만큼 민주화가 진척됐다는 만족의 소리가 들리는가 하면 기본권을 억누르는 각종 폐해가 여전히 건재하기 때문에 투쟁을 멈출 수 없다는 주장 역시 그 반대편에서 강력히 펼쳐진다.
현재 한국에서 이념은 경제의 문제가 아니다. 계급의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북한 및 기본권 문제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 의해 그 구체적 의미가 결정되는 철저히 정치 중심의 이념이다.
이번 여론조사 결과는 이를 분명히 보여 준다. 개인의 북한 및 기본권 인식은 이념적 정체성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대통령 후보에 대한 선택을 규정한다.
출신 지역과 세대라는 변수를 ‘통제’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한편 ‘객관적’ 소득 수준의 차이는 예나 지금이나 한국인의 투표 성향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성장을 선호하는가, 분배를 우선하느냐는 ‘주관적’ 경제 인식조차 무기력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대선의 기본틀을 짜는 게임이 끝난 것은 아니다.
이제 남은 것은 각 후보가 북한 및 기본권 문제를 놓고 구축해 놓은 자기 나름의 이념적 텃밭을 대선 때까지 이탈자 없이 끌고 나갈 수 있는지를 지켜보는 일이다. .
시민은 자신이 이념적 지지를 보내는 후보의 인품에 결함이 있고 그 스타일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면 언제든지 이념을 버리고 제3의 후보를 모색하거나 기권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동집필 김병국 이래영(고려대) 김주환(연세대) 교수
■조사 방법과 의미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 과정에서 ‘색깔론’이 거의 힘을 쓰지 못한 상황은 한국의 ‘이념 지도’에 대한 궁금증을 낳았다.
우리 국민은 어떤 이념 성향을 갖고 있는지, 또 그런 판단의 근거는 무엇인지 하는 궁금증도 함께 팽배했다.
이번 여론조사는 유권자의 정치ㆍ사회 의식을 조사하고 다양한 분석을 통해 그 심층구조를 밝혀 보려는 것이 출발점이었다.
조사ㆍ분석을 위한 기초 자료는 한국일보가 미디어리서치에 의뢰, 총 20개 항의 설문에 대해 지난달 27일에 실시한 전화 여론조사에서 얻었다.
설문은 고려대 김병국(金炳國) 이래영(李來榮), 연세대 김주환(金周煥), 경희대 김민전(金玟甸) 교수가 작성했다.
미디어리서치는 비례 할당 및 체계적 임의 추출법으로 전국 유권자 1,000여명을 표본으로 선정했으며 표본 오차는 95% 신뢰 수준에서 ±3.1% 포인트이다.
김병국 이래영 김주환 교수는 이번 3차례의 회의를 통해 조사 결과를 분석하고 해석했다.
이념 성향을 살필 수 있는 몇 가지 설문을 제시하고 그에 대한 응답 태도를 단순 평균하는 방법으로는 개인의 이념 성향을 온전히 판단하기 어렵다.
그럴 경우 어떤 사안에 대해 진보적이지만 다른 사안에 대해 같은 정도로 보수적인 사람은 중도파가 되고 만다.
이런 단순화 오류를 막기 위해 이번에는 요인 분석 기법을 도입했다.
미리 어떤 이념적 범주를 정해 놓고 조사해 꿰어 맞추는 것이 아니라 설문 결과 얻은 항목별 이념 분포를 묶어 낼 중요한 범주(요인)를 찾아 냈다.
요인 분석 결과 1~14번 설문 가운데 1ㆍ3번, 2ㆍ7ㆍ8번, 5ㆍ6번 등의 강한 상관 관계가 확인됐으며 각각 ‘대북 인식’, ‘기본권 인식’, ‘경제 인식’으로 규정됐다.
이 세 요인을 14번 설문, 즉 스스로의 이념 성향에 대한 주관적 평가 항목에 걸어 다중회귀분석을 한 결과 ‘대북 인식’과 ‘기본권 인식’이 주관적 이념 평가의 중요한 요인으로 드러난 반면 ‘경제 인식’은 별 의미를 갖지 못했다.
황영식기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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