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축구가 폴란드를 2-0으로 꺾던 날 밤, 신문사를 나와 종로를 거쳐 광화문 네거리를 향해 걸었다.차도만 점거하지 않았을 뿐이지, 그만한 젊은 열기의 인파를 만난 건 90년대초 정권 타도를 외치던 시위군중 취재 이후 처음이 아닌가 싶었다.
48년만의 월드컵 첫 승. 묘한 감회가 스쳤다. 그 48년의 꼭 두 배, 설립 96년의 전통을 가진 한국의 큰 서점 하나가 이날 오후 부도났다.
하나같이 붉은 옷을 입은 젊은이들이 “대~한민국, 세~계최강”을 외치는 종로 거리, 그곳의 명소 종로서적이 이날 문을 닫았다.
한때는 하루 5만명이 넘게 드나드는 사람들의 발길에 콘크리트 계단이 닳아 몇㎝나 움푹 파였다는 서점이다.
촌놈인 기자가 상경해서 대입 면접을 보고는 맨 처음 찾아간 ‘서울’은 이 서점이었다. 핸드폰은커녕 삐삐도 없던 시절, 이곳에서 만나기로 한 벗을 기다리며 선 채 책 몇 권을 섭렵한 것은 많은 이들에게 행복한 추억일 것이다.
서당의 매 맞는 학동과 훈장을 그린 단원의 그림으로 장식된 이 서점의 책표지로 책을 싸들고 나서면서 느끼던 뿌듯함은 또 어떠했나.
1907년에 생긴 종로서적은 이렇게 그냥 서점 하나가 아니라 20세기 한국의 상징적 문화공간이었다.
그러나 이 문화공간은 시대 변화에 대응하지 못했다. 이제 독자들은 인터넷을 뒤지거나, 패스트푸드점과 팬시점이 있는 대형서점에서 즐기려 하지, 좁은 서점 계단을 올라 책을 고르는 수고는 귀찮아한다.
동네서점도 마찬가지, 2002년 한국의 서점 수는 2,700여 개로 5년 전에 비해 반토막 났다.
이렇게 서점들이 사라지는 것은 그래서 한편으로 우리의 문화적 심성, 책으로 일궈야 할 그 심성마저 엷어지는 것 아닌가 하는 안타까움을 준다.
‘Be The Reds’라고 쓰인 붉은 옷을 입고 함성을 울리며 광화문을 행진하는 젊은이들 옆으로, 또 다른 대형서점 벽에 쓰인 문구가 보였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
하종오 기자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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