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치히로(千尋). 열살이죠. 열살짜리한테 너무 가혹한 일 아닌가요. 엄마 아빠는 나를 요괴들이 들끓는 마을로 끌고 와서는 두 사람이 그만 돼지로 변해버렸어요. 혼자 돌아갈까 생각도 했지만 그럴 수야 없죠. 엄마 아빠를 구할 때까지 여기 남아 있어야겠는데, 일하지 않으면 동물로 변한대요. 다행히 온천장에 일자리를 구했어요. 그런데 주인인 마녀 유바바가 이상한 계약조건을 내걸었어요. 이제부터 내 이름은 센(千)이라고.”올 2월 베를린 영화제에서 금곰상을 탄 미야자키 하야오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千と千尋の神隱し)’.
칸 베니스 베를린 등 3대 국제영화제에서 애니메이션이 대상을 탄 것은 처음이었다.
‘센과 치히로…’의 신화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2001년 7월 개봉한 일본에서의 관객수는 지금까지 2,340만명.
개봉 첫날의 45만 명은 ‘이웃집 토토로’의 총 관객수와 맞먹는다. 예순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천진난만하고 상상력이 풍부한 미야자키의 판타지에 매료될 준비를 단단히 해두어도 절대 실망할 일은 없다.
‘센과 치히로…’라는 제목에 속지 말 것. 센과 치히로는 동인이명(同人異名). 시골로 이사가는 게 못마땅해 자동차 뒷좌석에 벌렁 드러누워 칭얼거리던 소녀 치히로.
오래된 터널을 통과해 들어선 인기척 없는 마을에서 음식점에 음식만 있고 주인이 보이지 않자 이때다 하며 게걸스럽게 먹어대던 부모가 돼지로 변해버리고, 치히로는 몸이 점점 투명해진다.
인간은 올 수 없는 곳, 정령의 세계에서 살기 위해 치히로라는 원래 이름을 빼앗기고 센이라는 새 이름을 얻는다.
잃어버린 이름을 찾기 위해 그리고 엄마 아빠를 구해서 인간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센은 강해졌다.
연약하고 기대기만 하던 소녀에서 사랑과 헌신을 알고 목표를 향한 의지가 굳건한 인물로 달라졌다.
지독하게 악취를 뿜어대는 오물 귀신을 꾹 참아내고, ‘외롭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얼굴없는 귀신이 친해지자고 뇌물로 주는 금괴에도 넘어가지 않는다.
서로 융화할 수 없을 것만 같은 것들이 공존한다. 마녀 유바바가 운영하는 온천장은 일본 전통의 것이지만, 유바바의 방은 서양식이다.
잊혀져가는 일본고유의 전통과 문화에 대한 애정과 부채의식 때문에 미야자키는 전에 없이 일본적인 것에 집착하면서도 비일본적인 것과의 어울림을 만들어냈다.
다리가 여섯인 지하보일러담당 가마할아범을 도와 석탄을 나르는 ‘이웃집 토토로’(1988년)의 숯검댕이 출연도 난데없지만 반갑다.
머리 큰 엄마 유바바를 빼닮은 보우와 유바바의 새는 마법에 걸려 몸집에 어울리지 않게 뚱보쥐와 파리로 변신한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판타지적 요소가 한층 강화됐으나 분명 미야자키표 애니메이션이다.
오물귀신은 알고 보면 오염으로 더렵혀진 강의 신. 센의 든든한 보호막이자 사랑의 상대인 하쿠도 원래의 이름을 찾고 보니 강이다.
자연의 소중함에 대한 메시지를 꾸준히 던져온 미야자키답다. 돼지로 변신하는 치히로 부모의 식탐은 인간이 경계해야 할 탐욕의 상징.
교훈조이지만 상상력의 힘을 빌어 은유로 포장해내는 솜씨는 교묘하다. 미야자키가 결코 범인(凡人)일 수 없는 이유이다.
/도쿄=문향란기자
■미야자키 감독·스즈키 프로듀서 "아이디어 작품화 함께 판단"
"재주꾼 한 명. 우리(지브리)한테는 있지만 디즈니에는 없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프로듀서 스즈키 토시오(鈴木敏夫ㆍ54)가 말하는 그 재주꾼은 미야자키 하야오(宮岐駿ㆍ61)다.
‘센과 치히로…’의 국내 개봉(28일)을 앞두고 4일 일본 스튜디오지브리에서 미야자키와 스즈키를 만났다.
스튜디오지브리는 미야자키와 그의 선배인 다카하타 이사오(高畑勳ㆍ67)의 작품 제작을 위해 생겨난 애니메이션회사.
도쿄 인근 코가네이시의 한적한 주택가에 있는 목조 2층짜리 스튜디오지브리는 미야자키의 작품마다 보이는 자연에 대한 애정이 그대로 배어나왔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천공의 성 라퓨타’’바람 계곡의 나우시카’ ‘이웃집 토토로’등을 통해 자연주의적 세계관을 표현해온 일본의 대표적 애니메이션 감독.
대학시절 사회주의에 심취했던 그는 대학졸업 후 도에이 동화사에 입사, 노조활동을 하며 다카하타와 인연을 맺었다.
미야자키, 다카하타가 스즈키를 만난 것은 84년. 출판사에 근무하던 스즈키가 애니메이션 잡지를 만들며 셋은 의기투합했고, 이듬해 스튜디오 지브리를 설립했다.
미야자키는 “‘센과 치히로…’의 목욕탕을 지브리라고 비유하자면 유바바는 머리크기는 나, 하는 일은 스즈키를 생각해 만든 캐릭터”라고 말했다.
미야자키는 감독으로 제작을, 스즈키가 프로듀서로서 나머지 부분을 담당하는 것으로 역할분담이 돼있으나 지브리 브랜드는 곧 미야자키 브랜드를 의미한다.
그러나 미야자키가 천재일 수 있는 것은 “작품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스즈키”와의 협업체제가 견고하기 때문.
스즈키는 “미야자키는 평소에도 5, 6개의 아이디어를 갖고있다. 그 중 무엇을 작품으로 만들지, 어떤 작품으로 만들지에 대해 함께 판단하고 제안한다”고 말한다.
미야자키는 ‘원령공주’의 애니메이션화를 주저했으나 스즈키가 기회가 얼마 남지 않았다며 밀어붙였고 ‘센과 치히로…’를 미야자키는 20세 여성을 관객으로 만들고 싶어했으나 스즈키가 어린이를 위한 것으로 방향을 틀었다.
‘센과 치히로…’에 대해서도 미야자키는 센과 하쿠의 이야기라고 했으나 스즈키는 센과 얼굴없는 귀신의 이야기라고 소구 포인트를 집어냈다.
미야자키는 “‘센과 치히로…’에 발휘할 수 있는 역량을 모두 발휘했다. 흥행에 성공하고 안하고는 운이다”고 말했다.
‘원령공주’를 미국 개봉할 때 상영시간을 줄이자는 요구에 절대 응하지 않던 자존심을 다시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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