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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 특별기고 / 한국의 영웅들, 너희가 해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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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 특별기고 / 한국의 영웅들, 너희가 해냈구나!

입력
2002.06.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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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주 한 병 놓고 텔레비전 앞에 죽치고 앉았다. 어린 시절 바람 부는 운동장 가녘에서 청군 백군을 응원하던 그 동심으로 돌아가 있다.이겨라! 이겨라!

이겼다. 공이 폴란드 그물을 흔들었다. 벌떡 일어났다.

이겼다! 이겼다!

한국의 영웅들, 너희가 해냈구나!

이 첫 승!

얼마나 값진 것이더냐!

이겼다!

이기고 지는 것이 인간의 전부가 아니건만, 또한 이기고 지는 것 없는 세상은 인간의 세상이 아닐 것이다.

그 동안의 무거운 세월들이 새삼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저 식민지 시대의 어둠 속에서 베를린 올림픽에서 ‘히노마루’를 가슴에 달고 달려야 했던 손기정 선수의 승리는 안중근 윤봉길 열사에 버금가는 힘을 주었다.

그 모진 삶 지나 다시 한번 조국이 온통 폐허로 된 전란을 지난 뒤 살아남은 아이들이 돼지 내장으로 만든 엉터리 공을 차거나 헝겊을 똘똘 뭉친 공으로 헤딩을 하며 자라났다.

그 슬픈 축구가 바람 부는 황토 바닥 운동장의 국민 체육으로 되기까지 또 얼마나 곡절이 많았던가.

그 가난, 그 오욕을 지나 이제 우리는 올림픽 개최국이 되었고 월드컵 공동 개최국이 되기에 이르렀다. 전국 도처에 융단 초원이 깔린 월드컵 경기장은 뚝딱뚝딱 잘도 세워져 세계의 자랑거리가 되고 남는다.

오랫동안 버림받은 민족이던 우리가 그 버림을 떨쳐버리고 세계 현대사의 주류로 진입한 오늘에 이르기까지 흘린 피땀은 아직도 그 진한 비린내가 가시지 않는다.

2002년 6월4일 밤.

한국에서는 이 밤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한국 사람 전체가 붉은 악마 군단이 되어 숨죽였다.

부디 이겨라! 이겨라! 이 뜨겁고 간절한 기원과 함께 숨죽였다.

그런 뒤 벌떡 일어나 한국 축구의 영웅들이 이룩해낸 첫 승에 보내는 환호 소리가 한국의 밤을 뒤흔들고 말았다.

축구는 축구만이 아니다. 월드컵은 월드컵만이 아니다.

온갖 저질의 정서, 온갖 사회적 상실을 일거에 날려 버린 새로운 신명의 문화인 것이다.

어찌 우리에게만 그럴 것인가. 지구 전체가 그 신명의 현장을 확대함으로써 전쟁과 빈곤, 자연 파괴를 제압하는 인류의 보편적 희망으로 번져갈 것이다.

첫 승에 실패한 폴란드의 영웅들에게도, 폴란드 대통령에게도 위로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와 함께 첫 승을 이룬 한국의 영웅들은 16강 혹은 8강을 향해 내달려야 할 것이다.

선수들! 그대들은 한국 국운의 일부이다. 그 동안 쌓아올린 기량과 투지, 얼마나 가상한 것인가.

아, 술 맛이 그만이다.

고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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