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이 개막된 지난 달 31일 한국과 일본의 거리는 한결같이 평온했다. 월드컵 취재를 연속 9회나 했지만 이처럼 조용하게 시작한 대회는 아무래도 처음인 것 같다.개막식이 열리던 날 분위기를 살펴보기 위해 서울의 명동 거리를 거닐었다. 프랑스 관광객들이 한국의 전통의상을 입은 아가씨들과 나란히 기념촬영을 하고 있었다. 자세히 뜯어보니 민족의상 차림의 아가씨들은 바겐세일 전단을 손에 쥔 나레이터들이었다.
내가 처음 취재한 월드컵은 1970년 멕시코대회였다. 수도 멕시코 시티의 밤은 휘황찬란한 네온과 각양각색의 플래카드로 뒤덮였고 넘치는 인파로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98년 프랑스대회의 전야제 때는 거대한 인형이 파리 시내를 활보, 시민들에게 축제 기분을 마구 불어넣었다.
월드컵을 즐기려는 분위기가 경기장 주변, 이벤트 장소 뿐만 아니라 번화가와 골목 구석구석에 넘쳐 흘렀다. 서울은 너무나 평온했다. 서울의 개막식을 본 다음 날 일본의 개막전을 보기 위해 니가타로 날아갔다.
여기서도 축제는 볼 수 없었다. 경기장 주변은 너무 조용했다. 초등학생을 동원한 축하 이벤트가 진행되고 있었지만 시민들의 흥분된 열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열광적인 개막이 없었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테러 발생이나 훌리건의 준동을 우려해 엄중하게 경계한 것도 한 원인이었을 것이다. 더불어 본질적으로 온화한 동양인의 성품이 조용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역할을 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 남미에는 남미의 성격이 있고 유럽에는 나름의 기풍이 있다. 한국과 일본은 동양의 기풍이 어우러진 독특한 월드컵 분위기를 만들면 되는 것이다. 문을 열어 밖의 바람을 끌어들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배가 뒤집힐 정도의 태풍을 차분히 기다리는 것도 괜찮은 법이다.
바람은 조용히 불어 들고 있다. 니가타 경기장 밖에 젊은 어머니가 5세된 딸의 손을 잡고 걸어가고 있다.
이날 경기는 아일랜드 대 카메룬. 딸 아이는 볼에 국기 페인팅을 하고 있다. 지나가는 아일랜드 서포터가 아이에게 말을 건다. “귀여워라, 카메룬 국기를 그려넣었구나.” 젊은 어머니는 웃으며 답했다. “아임 소리(I’m Sorry)”.
겨울에 눈이 많은 니가타 사람들은 온후하고 성실하지만 과묵한 성격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여성들은 말 수가 없는 편이다.
이런 니가타에서 젊은 어머니의 모습은 국제적이었다. 월드컵의 바람이 조용하고도 온화하게 니가타의 분위기를 바꾸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월드컵의 바람이 조용히 사람들의 생활을 바꿔놓고 있을 것이다. 월드컵이 화두가 되고 신경이 점점 이쪽으로 쏠리지 않은가.
/일본 효고대 교수·축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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