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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정년 이후] 청소년상담원 홍보위원 된 이정희 前연합통신 외신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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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정년 이후] 청소년상담원 홍보위원 된 이정희 前연합통신 외신국장

입력
2002.06.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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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자로서는 처음으로 연합통신 외신국장을 맡아 화제가 되기도 했던 이정희(67) 한국청소년상담원 홍보위원.긴장과 취재경쟁이라는 숨막히는 오르막길에서 이제는 청소년문제를 풀어가는 한국청소년상담원에서 홍보를 담당해 내리막길의 여유와 관조를 즐기고 있다.

“요즘 지내기 어때요?”

“나야, 뭐-, 준비된 실업자 아니겠어요.”

언론계 어느 동료가 안부전화를 건 나에게 기다릴 틈도 없이 그야말로 ‘준비된 대답’을 던졌다. 그 때만 해도 나는 58세 정년을 한두 해 남겨놓고 있었다. 나보다 두어 살 아래인 그 동료는 나보다도 먼저 신문사를 떠났다.

지금 그가 ‘준비된 실업자’로 편안히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 몇 년 후 나도 36년 반 만에 언론계를 졸업했다. 어리석은 탓인지, 게으른 탓인지 진로(?)를 결정하지 못한 채로 문을 나섰다. ‘준비 안된 정년퇴직자’로.

울타리 밖 들판엔 햇빛이 찬란하게 쏟아지고 있었다. 게다가 시간에 매이지 않고 경쟁에 쫓기지 않아도 되는 여유. 이 자유와 자연을 누리며 등산, 산책, 독서, 그리고 그 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담을 쌓고 지내 온 이런 저런 모임으로 소일했다.

‘준비 안된 정년’의 아쉬움이 고개를 든 것은 며느리의 둘째 아이 출산과 딸의 첫 아이 출산을 전후하여 몸과 마음이 바빴던 시기가 지나면서부터였다.

그들의 생활이 어느 정도 제자리를 잡으면서 나에겐 다시 여유가 돌아왔다. 비록 준비는 안되었어도 새로운 일이 필요함을 강하게 느꼈다.

그런 사이사이 모 대학에 한 학기 출강할 기회가 주어졌고 영문 원서 한두 권을 번역하기도 했다. 모 그룹 사보에 2년 동안 매월 연재 기고를 하기도 했다. 이런 단편적인 일들은 나를 오래 붙들고 있지는 않았다. 주마등처럼 빨리 지나갔다.

지금 내가 꽤 오래 몸담고 있는 곳이 한국청소년상담원이다. 37년 가까이 한 우물을 팠던 나에게 이곳은 딴 세계였다.

초등학교에서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이르는 시기에 있는 청소년들의 여러 가지 문제를 다루고 있었다. 아이들 교육에 사회적 관심이 점점 높아가고 있는 요즘 청소년문제를 종합적으로 연구하고 상담하며 교육하는 국가기관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이곳에서는 온갖 고민을 안고 앓고 있는 아이들과 그들의 부모들, 그리고 그들을 도와주는 사람들에게 무료로 상담을 해주고, 밝고 올바른 성장에 필요한 교재와 자료를 제공하고 있었다.

대개 심리학, 교육학, 상담심리학, 사회복지학 등을 전공한 이곳 박사들과 석사들은 부드럽고 침착하며 친절했다. 무엇보다 진지하고 학구적이었다.

상담 받으러 온 소년 소녀들을 친동생처럼, 친자식처럼 따뜻하게 대하는 그들의 모습은 여태까지 내가 겪었던 편집국 풍경과는 대조적이었다.

여기서는 긴장과 자극이 상대적으로 적어 분위기가 가라앉아 보이기도 했으나 사람의 내면, 마음의 흐름, 희망과 좌절, 가능성과 실패, 아이들의 잠재력과 수월성…. 이런 본질적인 것들이 다뤄지고 있었다.

이렇게 좋은 일을 하고 있구나! 신선한 감동으로 나는 이곳 분위기에 어울려 갔다.

이 새로운 세계에서 3년째 일을 하고 있다. 나와 또 한 사람의 언론계동료가 여기서 맡은 직책은 홍보위원. 예전 기자시절 취재원으로부터 정보를 수집하던 입장에서 지금은 정보를 가공하여 기자들에게 제공하는 입장으로 바뀌었다.

역할 바꾸기를 경험하는 것은 하나의 좋은 기회이다. 기관의 정기간행물, 홍보 간행물, 홍보비디오 제작업무도 홍보위원 몫이다.

서비스를 받는 자리에서 서비스를 하는 자리로 내려가는 것을 기꺼이 선택할 수 있다면 새로운 기회를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호텔레스토랑에서 웨이터를 하는 기업체의 전직 부회장, 건물 경비를 맡은 전직 이사, 지하철 택배에 나선 군상, 공인중개사자격증에 도전하는 실버세대등 그들은 몇 가지 예일 뿐이다.

한국사회도 노령화 추세로 기울고 있다. 정년을 맞은 ‘젊은 노인’들이 늘어나고 있다. 모르긴 해도 그들 중 다수가 나처럼 ‘준비 안된 정년퇴직자’들일 것이다.

정년을 못 채우고 직장을 나오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두뇌로나 경험으로나 아직 쓸모가 많은 나이 든 인력을 계속 이용하기 위해 정년을 연장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으나 나는 반대한다.

청년실업자가 양산되는 현 상황에서 고 연령층은 일자리를 내어주어야 한다. 대신 젊은 인력의 일자리를 빼앗지 않는 범위에서 정년 후 인력을 흡수할 수 있는 틈새시장은 적극 개발돼야 옳다.

전문성과 함께 연장자로서의 지혜와 노하우를 가진 고급 노령인력이 필요한 곳에서는 정규보수에대한 ‘할인보수’로 그들을 기용할 수 있을 것이다. 임시직이나 계약직 같은 것이 여기 속할 것 같다.

일하는 여성의 자녀문제와 관련하여 어린이와 실버 세대를 연계해 양쪽에 다같이 혜택을 줄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 마련도 정부와 사회의 숙제이다. 함께 놀기, 한자교육, 질서훈련, 대인관계, 예절교육, 자연 사귀기 등.

그러나 더 나아가 노령인력이 단지 보조·보충인력에 머물지 않고 주력인력으로서도 생산성에 기여할 수 있도록 새로운 개념의 신 직종과 일거리가 창출되어야 할 것이다.

다시 나의 이야기로 돌아온다. 퇴임 후 한때 울타리 밖 삶에서 느끼는 허전함이 있었다. 보호막을 상실한 듯한 느낌이었다. 세상 주류에서 밀려난 것 같은 콤플렉스에 잠기기도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한 걸음 떨어져, 막후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편안함에 맛들여지고 있다. ^산을 오를 때 지나쳤던 곳곳의 숨은 경치를, 내려오면서 여유 있게 뜯어볼 수 있는 기쁨이 있어 좋다. 내려다 볼 때는 보이는 게 더 많은 법이다. 내려갈 준비만 돼 있다면 할 일도 많으리라.

또 자기이익 추구에서 방향을 돌린다면 남은 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더더욱 할 일이 많을 것이다. 어느 길을 선택하든, 정년 이후의 삶이 이번만큼은 ‘준비된 죽음’까지 이어지는 새로운 문화 만들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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