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멜로의 대명사격인 ‘미워도 다시 한번’이 또 다시 리바이벌 되었다.유부남과 사랑에 빠져 그의 품에 아이까지 안겨주는 주인공의 모습에는 ‘사랑하는 이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여성’이라는 전형적인 멜로의 공식이 어른거린다.
엉뚱한 상상을 하나만 해보자. 만약 사랑하는 사람과 ‘나 잡아 봐라’며 술래잡기를 하던 여주인공이 갑자기 돌아서서 ‘나 안잡으면 죽어’라고 남자 주인공에게 엄포를 놓는다면?
확실히 2000년대 들어 한국형 멜로의 여주인공들은 변하고 있다.
‘엽기적인 그녀’의 전지현은 모든 착한 남성의 대표처럼 보이는 차태현을 두들겨 패는 것도 모자라 실험용 마루타처럼 물에 빠뜨리고 괴롭힌다.
그녀는 다소 제멋대로지만, 별다른 심리적 억압없이 당당한 모습으로 이 땅을 헤집고 다니는 신세대 멜로의 매력적인 여주인공이다.
요즘 멜로에 전문직을 지닌 여성은 필수. 그녀는 남자를 기다리기보다 먼저 접근하고 또 헤어질 때도 과거의 정에 얽매이지 않을 만큼 ‘쿨’하다.
‘봄날은 간다’에서 연하의 남자 유지태에게 “자고 갈래요?”라고 제안하는 이영애.
그러다 보니 요즘 멜로에는 남자와 여자의 역할이 뒤바뀌거나 연상과 연하, 이혼녀와 총각의 연애담, 동거를 하는 커플도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예를 들면 ‘와니와 준하’의 김희선과 주진모는 아예 남녀의 역할을 뒤바꾸어 산다.
김희선은 ‘엽기적인 그녀’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결혼에 목을 거는 신데렐라 지망생도 아니다. 아예 결혼과 동시에 다른 남자와 몰래 살림을 차리는 정말 간 큰 여자도 등장했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의 엄정화는 남자 친구의 어머니 앞에서 조신하게 사과를 깎는 내숭도 떨 줄 알지만, 낯선 남자와 처음 만난 날 ‘택시비보다 여관비가 싸겠다’는 남자 말에 여관방으로 직행한다.
사랑보다 육체가 앞장서고, 현실로서의 결혼이 판타지로서의 연애와 평행선을 긋는, 멜로라는 장르는 이제 당대의 사회적 관습과 신분차이에 투항하기보다 오히려 사랑이라는 신화적 허구의 틈을 비집고 기생하는 독버섯 같은 면마저 보이고 있다.
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문득 한 남자에게 목숨을 걸고 결혼을 통해 완성하려 했던 ‘약속’이나 ‘편지’의 주인공 같은 90년대 지고지순한 숙녀들은 이미 먼 과거의 이야기만 같다. 나
아가 2000년대의 대한민국 멜로는 보수적 관점에서 보면 경천동지할 여주인공들도 아웃사이더적인 건강함의 상징으로 따뜻하게 감싸준다.
동거든 불륜이든 금기의 연애이든 칙칙한 눈물에 절여진 기색 없이 언제나 산뜻한 멜로 영화속의 여주인공들.
이 속에 현실을 감내해가는 내음이 없는 것은 유감이지만, 그나마 2000년대 멜로는 대한민국의 여성들의 욕망을 사유하기 시작했다.
비록 일반적인 관객들은 할머니의 품을 통해 ‘집으로’ 돌아가길 원하지만, 우리의 딸들은 오히려 결혼 이혼 동거 동성애 등 다양한 형태의 모듬살이속을 통해 ‘집에서’ 나오기를 고대하고 있는 것 같다.
영화평론가
chinablue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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