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진하 -
오동나무 숲으로 산책을 가려고 집을 막 나서는데
잠깐! 아내가 날 불러 세웠다.
부엌에서 나온 아내는 미나리를 씻다가 발견했다며
달팽이가 붙어 있는 미나리 순을 내밀었다.
산책 가는 길에 숲에 풀어 놓아주라고.
푸른 미나리 순에 붙어 꼼지락대는
아기 손톱보다 작은 달팽이를 모셔 들고
나는 숲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차도에는 죽음의 공기를 퍼뜨리는
차들이 쌩쌩 달리고 있었지만, 나는
달팽이를 나르는 生命의 수레.
길을 걷다가 내 손에 들린 달팽이를 보니
뿔더듬이를 허공에 쳐들고
느릿느릿 춤을 추고 있었다.
(원, 세상에, 이렇게 느린 춤이 있다니!)
숲길로 접어들어 보랏빛 향 그윽한
숲 그늘에 가만히 달팽이를 놓아주었다.
달팽이는 여전히 춤을 추며
풀숲으로 천천히 기어 들어갔다.
숲은 한결 더 푸르고 깊어 보였다.
■시인의 말
있다는 것인즉 축복이고, 산다는 것인즉 거룩하다. 아주 사소해 보이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삶은 얼마나 신비하고 경이로운가
■약력
▲1953년 강원 영월 출생ㆍ감리교신학대 졸업 ▲1987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시집 '지금 남은 자들의 골짜기엔' '프란체스코의 새들' '우주배꼽' '얼음수도원' 등 ▲김달진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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