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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500)가리발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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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500)가리발디

입력
2002.06.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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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6월2일 이탈리아의 통일 운동가 주제페 가리발디가 카프레라섬에서 작고했다.향년 75세. 카프레라섬은 가리발디가 49세의 나이로 남부 이탈리아 정복의 시동을 건 곳이기도 하다.

니스에서 선원의 아들로 태어난 가리발디의 삶은 젊은 시절 남아메리카 우루과이의 독립전쟁에 참가하던 시절을 제외하면 일관되게 이탈리아의 통일과 독립이라는 대의에 이끌렸다.

청년 이탈리아당을 만들고 이끈 주제페 마치니, 사르데냐 왕국의 총리로서 나폴레옹 3세에 대한 굴욕 외교를 감수하며 이탈리아의 이익을 방어한 카보우르 백작과 함께 가리발디는 이탈리아 통일 전쟁의 3걸로 꼽힌다.

가리발디는 통일된 자주적 이탈리아라는 목표를 위해 젊은 시절 이래 견지하던 정치적 신념까지 포기했다.

그가 ‘붉은 셔츠대’를 이끌고 시칠리아와 남부 이탈리아를 정복해 사르데냐 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에게 바쳤을 때, 그 행위는 한 때의 이 견결한 공화주의자에게 치욕이 아니라 영광이었다.

갈기갈기 찢긴 채 오스트리아, 스페인, 프랑스 등의 외세에 농락당하던 이탈리아를 하나로 묶어 세우려는 민족주의적 정열은 19세기 들어서야 분출됐다.

리소르지멘토(부흥)라고 불리던 이 시기의 이탈리아 통일ㆍ독립 운동은 1861년 전국의 대표들이 토리노에서 의회를 열고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를 이탈리아의 초대 왕으로 선언함으로써 일단락됐다.

리소르지멘토는 이탈리아 내부의 계급 구조가 투영된 공화주의와 군주제,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지역과 지역 사이의 분열을 봉합하는 과정이면서, 외세의 개입에 맞서는 군사적ㆍ정치적 투쟁의 과정이기도 했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에드몬도 데 아미치스의 장편동화 ‘사랑의 학교’(1886)는 그렇게 어렵사리 태어난 이탈리아 왕국을 기리는 송가라고 할 수 있다.

고종석편집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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