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내게 수면제이다. 글자가 빼곡할수록 약효는 강하다. 그 많은 가로획과 세로획, 그리고 휘어진 호와 원들의 조합이란 책을 읽고자 펼친 내 눈에는 서너 장을 넘기기도 전에 벌써, 의미로 전달되기보다 기하학적인 도형들의 나열로 최면을 걸어온다.어릴 적부터 그랬다. 그런 내 자신을 뻔히 알면서도 책이라는 물건을 좋아하는 것은 어인 이유인지 잘 모르겠다.
특히 좋아하는 책은 과학책이다. 중학교, 고등학교 때 외워대던 화학식과 물리공식은 다 잊어버렸지만 이야기로 풀어놓은 과학은 참 재미가 있다. 과학책에 나오는 내용이 허구일 수 있지만, 그래도 그것을 사실이라고 믿고 싶다.
그 가운데서도 우주 이야기가 특히 재미있다. 영화도 ‘스타워즈’처럼 우주공간과 별에 관한 것을 볼 때면, 무용 연습 뒤에 밀려오는 피곤함이 금방 잊혀진다.
올 1월 리용무용학교 학생들에게 작품을 만들어주기 위해서 3주 동안 프랑스에 머물렀는데 그때 친구가 된 책이 있다.
스티븐 호킹의 ‘호두껍질 속의 우주’(까치 발행)다. 이 책은 지난해말 국내에서 번역, 출판됐는데 프랑스에 가기 전 일부러 구입해 가져갔다. 현지에서는 작품 작업을 하느라 바쁜 시간을 보냈으며 밤이 되면 피로가 몰려왔다.
그런 와중에서도 나는 침대에 누워 이 책을 읽었다. 그래 봐야 하루 10페이지 남짓이었지만 혼자 밤을 지내는 외로움을 잊고 우주에 대한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책에서 설명하는 여러 우주과학 이론들은 전문적이고 이해하기 힘든 것이 적지 않았다.
벌레 구멍이라든지, 빅뱅, 말려진 차원, 암흑물질…. 그래서 같은 내용을 조금 쉽게 쓴 책은 없을까 생각도 했지만, 이 어려운 내용을 가지고 침대에 누워 신나는 공상을 한 것은 그 자체로 신나는 일이었다.
사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지구와 우주에 관심이 많았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형과 은하수를 함께 보고 혜성을 보겠다며 밤을 꼬박 지샌 적도 있다.
책도 마찬가지여서 과학책이나 이야기 수학책이 좋았지 남들이 쉽게 읽는 소설은 길이가 조금만 길어져도 무료함을 느꼈다. 그 같은 나의 독서 기호를 충족시키고 외국 생활의 지루함을 달래준 책이 바로 ‘호두껍질…’이다.
/홍승엽 현대무용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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