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생물의 힘버나드 딕슨 지음ㆍ이재열 등 옮김
사이언스북스 발행ㆍ1만5,000원
1347년 흑사병이 유럽을 강타한다. 불과 4년 만에 유럽 인구의 3분의 1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인구의 감소는 음식, 주거, 일자리 등 기본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인간의 경쟁을 줄여주었다.
인구가 줄면서 농민 개개인이 차지하는 곡물의 양이 늘어나고, 부유한 사람들은 친인척의 재산까지 물려받아 재산을 더 늘렸다.
사람들은 생활에 여유를 갖게 되면서 좀 더 사람답게 살기 위한 조건을 생각했고 그것이 르네상스로 이어졌다.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원정하던 1812년 티푸스열이 발생했다. 이 병은 이질과 함께 나폴레옹의 50만 대군을 괴롭혔다.
적에게 죽은 병사보다 질병으로 죽은 병사가 더 많았다. 모스크바에서 후퇴하기 시작한 10월에는 임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군인이 8만 명이 채 안됐다.
2차 세계대전 중 폴란드의 의사 라조프스키와 마툴레비치는 로즈바도프 지역에 티푸스열이 창궐하고 있다며 독일군을 속였다.
티푸스균에 감염되면 티푸스와 프르테우스 항체가 함께 생성된다는 사실을 이용했다. 고열을 일으키는 티푸스와 달리 프로테우스는 질병을 동반하지 않는다.
두 의사는 사람들에게 일부러 프로테우스균을 주사, 항체를 만든 뒤 점령자인 독일군에게 티푸스에 걸렸다고 주장했다. 독일군은 이를 그대로 믿고 티푸스의 확산을 막기 위해 주민들을 강제 노역에서 제외했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온전한 생명체라 할 수도 없는 미생물_세균, 바이러스, 곰팡이, 원생동물 등_은 이처럼 인간사회에 영향을 미치면서 ‘보이지 않는 권력자’로 인류와 공존해왔다.
미생물 생화학 전문가이자 과학 저술가로 널리 알려진 영국의 버나드 딕슨의 1994년 저작 ‘미생물의 힘’은 75개의 짧은 이야기를 통해 역사적ㆍ문화적ㆍ사회적ㆍ과학적 관점에서 미생물을 탐구한 책이다.
미생물이 인류의 역사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고 앞으로 세계를 어떻게 바꿀지를 전망하는, 부담없이 읽을 수 있는 대중과학서이다.
책에 나오는 미생물은 모습이 매우 다양하다. 훌륭한 포도주와 맛있는 치즈를 만들어 식도락의 즐거움을 선사하며 석유를 풍부하게 공급하는 근원이자, 액상 폐기물을 깨끗하고 안전한 음용수로 처리하는 활발한 행동가이기도 하다.
천연두와 흑사병, 콜레라와 에이즈, 그리고 지난해 9ㆍ11테러 직후 세계를 공포에 떨게 했던 탄저까지 무시무시한 전염병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흙이나 초식동물 안에 있다가 언제라도 유행병을 일으키는 파상풍균이나, 진드기 속에 숨어있다 전염성 관절염을 일으키는 리케치아균은 주변 환경에 교묘히 위장해 있다가 이따금 말썽을 일으키는 ‘두 얼굴의 기회주의자’다.
하지만 미생물은 잘만 활용하면 인류의 미래를 풍요롭게 할 수 있다. 메탄을 메탄올로 산화시키는 미생물 메틸로시누스 트리코스포륨은 화학산업에서 나타나는 특정 산물을 분해하고 지구의 오존층을 보호한다.
미국의 마이크로빅스사가 개발한 마이크로톡스 시스템은 바닷속 깊은 곳에서 빛을 발하는 미생물 포토박테륨 포스포레움을 이용, 공해물질을 추적하는 장치로 카드뮴에서부터 우유의 잔류 항생물질까지 광범위한 물질을 측정하는데 도움을 준다.
책은 미생물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가는데 주력하면서 특별히 강한 주장을 펴지는 않는다.
다만 미생물이 놀라운 적응력과 융통성을 발휘하며 인류가 지구상에 나타나기 전부터 존재했고, 앞으로 사람이나 다른 ‘고등 동물’이 사라지더라도 오랫동안 지구에서 존재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 세계의 지배자는 거대 생물이 아니라, 미생물”이라는 결론을 자연스럽게 이끌어낸다.
“지구에서 가장 작은 세균의 무게는 0.000000000001g에 불과하다. 고래의 무게는 100,000,000g에 이른다. 그렇지만 이 세균이 고래를 죽일 수도 있다.
박광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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