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정에 겹던 문청 시절에는 “왜 글을 쓰는가” 라는 물음이 “왜 밥을 먹는가” 라는 소리처럼 해괴하게 들렸다.목수더러 대패질, 못질을 해서 왜 집을 지으려는가 하고 묻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데 얼마 전 홈페이지 게시판에 이런 글이 올라온 일이 있다.
“문학을 하려고 합니다. 월수는 얼마쯤 되며 전망은 어떤 것인지 자세히 좀 알았으면 합니다.”
문학이라는 말의 근처에도 가 본 적이 없는 실업계 고교 졸업반쯤의 학생이려니 했다가 정작 질문자가 여중생으로 드러나 더 놀랐을 것이다.
글을 읽었을 때 도대체 어이가 없던 그 첫 느낌은 그러나 차츰 가시가 씹히는 듯한 그런 기분으로 변했다.
월수라…. 끝내 댓글을 거기 달아주지는 못했지만 그새 필자가 나름으로 궁리 궁리해본 대답은 대충 이렇다.
“여성 상위시대가 오고 있습니다. 앞으로 여성천하의 시대가 오는 것도 시간 문제겠지요. 그러므로 전망도 아주 밝습니다. 재미있는 소설을 써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면 월수 천 만원 정도는 예사가 아닐까요. 그렇게 되면 사진발도 잘 받아야 하니까 얼굴 가꾸는 일에도 게을리 마시고….”
힐책 삼아 눙쳐 본 소리가 아니다. 잡다한 영상 매체들의 영향을 들먹이면서 여기저기서 ‘문학의 위기’ 운운 하는 소리는 나오고 있어도, 그 많은 대학의 그 많은 문예창작과 학생들조차도 ‘데뷔’라는 소리가 입에 익고 ‘사진발’이 노상 염두에 늘어붙어 괴롭히고 있다면 이건 어쨌든 문학에 대한 열정의 증좌이지 불모 현상은 아니다.
그 표출방식이 어쩐지 뒤틀려 있다고 생각될 뿐이다.
비근한 예로 이를테면 근자 나온 창작집들 중에 사진 대문짝만하게 겹으로 안 실리고 평론가의 보완해설 곁들이지 않은 책을 본 적이 없다.
그것도 생각하기 나름이겠지만 가령 전람회 팸플릿 같은 것에 간단한 약력 외에 상 받은 이력이나 여타의 직함과 해설 따위들이 줄줄이 페이지를 메우고 있으면 “이 작자 작품이 허하니까 간판이나 내세우는군” 하는 생각이 제풀에 들어도, 문학 쪽은 어떻게 된 셈인지 그런 요란이라도 떨지 않으면 책이 팔리지가 않는다는 것이다.
아름다우라고 치장한 책이 저자의 아집이나 야망, 상품광고에 동원되는 탤런트의 이미지부터 전달한다면 분명 뭔가가 잘못된 게 아니겠는가.
물론 몰염치한 출판업자들의 파행으로 전적인 탓을 돌릴 수도 있다.
문지나 창비 도장을 배꼽에 찍지 못하면 체면이 서지 않는다거나 그게 싫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기인 행세라도 해서야 그나마 몇 권쯤 책이 팔린다는 소리 역시 그런 눈요기 파행의 한 증좌다.
문학의 주 소비층이 만화 독자들이기 때문인지 바야흐로 멀티 영상 시대이어서 그런지 알 수가 없다.
아니면 우리의 문화층이 아직도 과도사회의 난장판 대합실 수준을 벗어나지 못해서 그렇다는 것일까.
그런 식의 데뷔나 그 부침이 가수들처럼 월 단위가 아니어서 다행이라고는 해도, 이건 시장의 도떼기판이지 제대로 가고 있는 문학의 행태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마음의 가난이나 겸손이 작가가 지녀야 할 기본 덕목의 하나라고 아직도 믿고 있는 필자가 시대에 뒤져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왕년의 사대부나 제도권의 먹물 선비들을 비웃던 이념권의 먹물 선비들처럼 가난을 짐짓 체통으로 여기고 자랑 삼을 생각이 필자에게는 없다.
배가 부르면 하루아침에 부르주아지 속성을 드러내고 여의치 못하면 송곳니 갈기를 계속 강요하는 세태가 여일하게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고는 해도 단세포적인 그런 시대의 속성 만을 탓할 수도 없을 것이다.
변덕스럽고 누추한 그 꼴들을 그동안 너무 흔하게 보아와서가 아니라, 정직하게 써서 정당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어야 비로소 문학도 당당한 그런 것이 될 수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글 쓰는 일이 자기 구원이니 세상에 대한 보복이니 하는 소리도 그런 시류와 허세의 악순환 틈에서 비어져 나오는 비명일지 모른다.
문학이 구원이 되려면 죄를 인정해야 하는데 진보도 보수도, 참여도 순수도 제 허물을 자인하는 사람은 지금 아무 데도 없다.
필자는 문학을 구원에 이르는 무슨 종교 같은 것이라고도, 그것을 넘어서는 해탈 같은 것이라고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더구나 그것이 민족혼과 그 중심에 가 닿을 수 있는 결연한 의지라거나 공평한 세상에 일조하는 도구라는 식의 가당찮은 생각 같은 것은 꿈에서조차 떠올려본 적이 없다.
그런 것들을 믿었다면 지금쯤 사제가 되었거나 지사라도 되어 벌써 문학을 버렸을 것이다.
충만하면서도 근원적으로는 공허한 바다처럼, 필자에게 문학이란 차라리 어깨에 힘주어야 하는 그 모든 거창한 것들을 완전히 제외시켜 버리고 난 뒤에야 만날 수 있는 어떤 실체이다.
굳이 따지라면 그것은 나와 세상 사이의 혹종의 ‘관계’이고 그 알파 내지 플러스일지 모른다.
그러니까 한 올의 거짓도 틈입 못할 정도로 나와 세상 사이가 긴장으로 팽팽하게 당겨졌을 때에야 그 핀트도 바로 잡힌다.
쓸쓸한 빈소에서 홀로 절하고 있는 사내의 양말 뒤꿈치에 구멍이 나 있으면 그것은 어김없는 이 나라의 시인이고, 술 한잔 걸쳤다고 그런 시인에게 덤벼들어 무작정 주먹다짐을 하는 것도 자세히 보면 영락없이 시인이다.
좋은 세상 만든다고 외치고 있는 자는 정상배고, 광주를 떠들고 있는 자는 틀림없이 거기서 도망쳤던 자이다.
이런 부정적인 시선을 강요하는 세상과 그 부정을 다시 부정하려는 자아 사이의 긴장. 굳이 주제까지 말을 하라고 한다면 필자가 여태 써온 글들의 중심 뼈대는 모두가 그것이었다고 할밖에는 없다.
이 땅의 세칭 그 ‘민주화 투쟁’ 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점검해볼 요량으로 1970년대를 백 플래시로 삼은 어느 소설에서던가 ‘저는 발끝 하나 다치기 꺼리면서 남의 목숨은 분신이나 하라고 불구덩이 속에 차 넣던 자들’을 용서할 수가 없다는 대화를 지문으로 썼다가 일간지의 어느 서평 담당 기자에게서 시비 비슷한 항의를 지상으로 당한 적이 있지만, 노조 위원장 같은 유형은 절대로 소설 속에서도 악당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식의 그 적절하고도 해괴한 논리나 그럴 수 있기 때문에 소설이야말로 가장 정직한 어떤 형식이 아닐까 보냐는 이쪽의 해명도 말하자면 나와 세상과의 그런 시각적 관계이다.
적절하다는 것은 ‘노조 위원장’이라는 대명사가 당대 시류의 긍정적인 대세를 이루고 있거나 그 일반적 연민 아니면 공감 같은 통념을 가리키고 있어 그렇다는 것이고 그것이 해괴하다는 것은 문학의 자주성과 그 반역의 속성과 정체성 따위를 말하는 소리이다.
국문과 출신의 어느 비평가가 국문학자를 소설 속에서 희화화 시켰다고 비비 꼬였다느니 뭐니 하고 횡설수설한다면 그것이 제대로 된 비평이고 옳은 비평가라고 할 수가 있을까.
이 나라에서 문학을 한다는 소리는 그래서 결국은 가난의 의지로 되돌아오게 되는 것일지 모른다. 일견 깨끗하고 겸허해 보이기는 하지만 속은 텅 빈 채 아무 것도 없는 것을 가난이라고 한다면 일제 말기부터 시작된 필자의 가난은 한마디로 벌거벗은 자연(自然)이었다.
새삼 바라볼 것도 없던 그 자연. 그것도 새나 나무나 수풀들이 어우러져 만드는 울창한 숲 같은 것이 아니라 눈 닿는 한 벌겋게 묻어나는 황토와 시든 잡초가 반점(斑點)처럼 얼룩진 황폐한 들판이 전부였던 그 자연.
미당의 시를 빌리자면 ‘말라버린 여울바닥은 독자갈들을 드러내고 그 위에 또 무당이 포개어 앉아 오른손의 금을 펴보는’ 그런 벌거벗은 자연 말이다.
지루해서 더 이상 견디며 바라볼 수가 없던 그 가난한 자연이야말로 뜻밖에도 예사롭지 않은 인내심을 밑천처럼 필자에게 남겨놓았던 게 아닌가 싶은 것이다.
■이제하 연보
▲1937년 경남 밀양 출생
▲홍익대 서양화과 중퇴
▲1957년 ‘신태양’ 신인문학상에 소설 ‘황색 강아지’ 당선ㆍ1958년 ‘현대문학’에 시 ‘노을’ 등으로 추천 완료
▲소설집 ‘초식’ ‘기차, 기선, 바다, 하늘’ ‘유자약전’ ‘용’ 장편소설 ‘광화사’ ‘소녀 유자’ ‘진눈깨비 결혼’ 시집 ‘저 어둠 속 등빛들을 느끼듯이’ ‘빈 들판’ 영화칼럼집 ‘이제하의 시네마천국’ ‘괴짜들 짱구들, 젊은 영화들’ 등
▲이상문학상(1985) 한국일보문학상(1987) 편운문학상(1999)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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