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시민들이 머리를 식히기 위해 즐겨 찾는 강동구 암사동 유적공원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신석기시대 마을 유적을 복원해 놓은 곳이다.BC 5,000년에서 BC 3,000년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유적은 1925년 을축(乙丑)년 대홍수 때 빗살무늬토기 조각들이 발견되어 알려졌다.
조그만 토기 조각들이 수천 년의 역사를 읽어내게 한 것이다.
유적이 제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은 1970년대 초반 국립중앙박물관이 발굴을 시작하면서부터다.
발굴 조사에서는 먼저 층위와 집자리 윤곽을 찾는 작업부터 했는데 이것이 무척 힘들었다. 햇볕이 내려 쪼이면 모래땅 전체가 하얗게 되어 도대체 윤곽을 찾을 수 없었다.
지게로 물을 길어다 뿌려가면서 땅 표면을 긁어 윤곽을 찾아 얼른 표시를 한 뒤 내부를 조사하였다.
발굴단원들 각자 집자리를 하나씩 맡아 땅을 파 내려가면서 조사하였는데 거의 매일 새로운 유물과 유구(遺構ㆍ옛 구조물)를 대하게 되었다.
특히 탄화한 도토리나 새로운 문양의 토기, 그리고 벽체, 화덕과 같은 가옥의 구조를 찾았을 때는 모두 환호했다.
지금은 유적이 아파트 숲과 강변도로에 둘러싸여 있지만 30년 전 발굴 당시만 해도 암사동은 농사 짓고 닭 돼지 등을 키우던 한적한 변두리 지역이었다. 그런데 행정구역상 서울이어서 출장비가 나오지 않았다.
출퇴근하기엔 시간도 부족해 돼지우리와 이웃한 조그만 방을 하나 빌려 단원 5~6명이 함께 자면서 조사했다.
심한 악취를 견디며 좁은 방에서 겹쳐 자다시피 하느라 고생이 많았다. 하지만 워낙 좋은 유적이라 발굴 작업이 즐거웠기 때문에 발굴 기간 중 시내에 있는 집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발굴 내용을 기록하는 ‘야장(野帳)’은 조사자에게 더없이 소중한 물건이다. 3차 발굴 때로 기억하는데 뒷간에 갔다가 호주머니 속에 넣어둔 야장을 그만 빠뜨리고 말았다.
그냥 버릴 수가 없어 바닥에 엎드려 천신만고 끝에 건져냈다. 그것이 돈 뭉치였다 해도 그랬을까 싶다. 야장을 다시 옮겨 적는데 무척 애를 먹은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마지막 4차 발굴 때는 시국이 꽤나 어지러웠다. 전국적으로 운동권 학생들에 대한 수배령이 내려졌는데 이 파장이 발굴 현장에까지 미칠 줄은 아무도 몰랐다.
필자의 대학교 과 후배 Y씨가 학생운동의 거물로 수배중이었는데 공교롭게 발굴단원인 한영희씨(작고)와도 고교ㆍ대학교 동기동창이었다.
경찰은 Y씨가 발굴 현장에 은신했을 것으로 보고 현장을 덮쳤다. 실랑이 끝에 한씨가 경찰서에 끌려가 밤샘조사를 받고서야 풀려나왔다. .
4차례 발굴조사로 남한지역 최초의 신석기시대 마을 유적이 확인됐고 당시 생활상이 보다 확연하게 드러났다.
또 각 집자리에서 출토된 목탄으로 여러 개의 방사성탄소 연대 측정치를 얻어 중서부 빗살무늬토기 문화의 시간적 틀을 구축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기도 했다.
요즘도 시간이 나면 암사동 유적 공원을 찾아가곤 한다. 30년이라는 세월을 순식간에 거슬러 올라, 몸은 힘들었지만 더없이 행복했던 발굴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건무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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