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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작가 귄터 그라스 회견 "통일, 체제보다 정신의 융합이 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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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작가 귄터 그라스 회견 "통일, 체제보다 정신의 융합이 우선"

입력
2002.05.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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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통일성을 지속적으로 담보하는 것은 체제가 아니라 결국 인간의 정신이다.”1999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귄터 그라스(75)가 한국을 방문한 것은 분단 체제인 한반도의 현실 때문이었다.

그라스는 28일 판문점을 방문, “이렇게 아름답고 목가적인 곳에 이런 군사적 정치적 긴장과 대립이 존재한다는 것은 마치 한편의 부조리극을 보는 것처럼 황당하다”고 말했었다.

독일 통일에 앞서 통독의 위험성을 예언했던 그라스는 독일이 통일된 지 1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양독간에 정치 경제적 격차는 빠른 속도로 극복되지만 정서적 심리적 간극이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 상황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통일은 제도나 체제의 통합이기에 앞서 인간과 정신, 즉 문화적인 것의 융합”이라고 주장해 온 그라스는 29일 주한독일문화원 강당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도 “한국은 북한에 퍼주는 것을 아까워하지 말라”며 ‘정신의 융합으로서의 통일’을 누차 강조했다.

-독일이 통일된 지 12년이 지났습니다. 통독의 현실을 보면서 한국의 분단 상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내 청년 시절, 20대에 한국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한국전쟁은 냉전의 시기와 직접 맞물린 역사적 사건이었지요. 한국은 독일이 범했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1970년대 초반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는 ‘동방 정책’을 수행했습니다. 브란트는 동서독이 통일의 문으로 함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소련의 협조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지요. 한편으로 동독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그는 ‘접근을 통해 점진적으로 가까워지기 위한’ 방식을 택했습니다. 양측은 이산가족 만남, 의학 협정 등을 통해 점진적 교류를 나눴습니다. 분단 독일에서의 소련의 협조는 분단 한국에서 미국의 역할과 견주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최근 나는 미국이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북한을 적대적인 국가로 규정하는 이 같은 발언은 한반도 통일에는 악영향을 미칠 만한 것이었지요.”

-한반도가 통일의 문에 좀더 가까워지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는 작가로서, 지식인으로서 통독 과정을 지켜 보면서 독일 통일의 위험성을 경고해 왔습니다. 한반도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파악하지는 못하지만, 통일에 보다 가까워지려면 남한이 세금을 올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남한이 아무런 전제조건 없이 국민의 세금을 통해 북한을 지원한다면, 미국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체적인 통일을 이룩할 수 있지 않을까요. 궁극적으로 인도주의적인 차원에서 북한을 지원하는 방식이 될 겁니다. 독일의 예를 들어볼까요. 통독 이후 헬무트 콜 당시 총리는 보유하고 있던 국가 자산만으로 동독의 경제 상황을 개선해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여기에다 미래를 내다보는 투자마저 전무했습니다. 결국 동독 경제는 파탄 지경에 이르렀지요. 세금을 올려서 동독을 지원할 수 있는 시기를 놓쳐버렸습니다. 이 때문에 동독 경제가 서독과 격차를 빠른 시간에 극복하지 못함으로써 여러가지 문제들이 생겨났습니다. 한반도가 이런 실수를 번복하지 않기를 거듭 바랍니다.”

-남한에서는 인도주의적인 지원에 대해서 ‘무조건 퍼주기’ 식이 아니냐는 반발도 있습니다.

“남한이 북한을 지원하는 효과는 무조건적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북한이 (분단으로) 받은 고통은 남한보다도 더 클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생각해 본다면 도덕적 차원, 인도주의적 차원에서의 지원을 이해해야 합니다. 역사의 승리자로서 남한은 북한에 상처를 주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접근을 통해 점진적으로 가까워지는’ 통독 과정은 한국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요.

“남북한이 상호 접근을 통한 통일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걸릴 겁니다. 그러나 나는 남북한이 ‘접근을 통해 점진적으로 가까워지기 위한’ 상황이 성숙했다고 봅니다. 상호 접근의 중간자의 역할이 중요할 텐데요, 28일 판문점을 방문한 자리에서 중립국 감시위원단에 주목했습니다. 현재 남북한이 협상하고 조율하는 과정은 대부분 미국에 의존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나는 미국보다는 중립국 감시위원단이 남북한을 이어주는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국제 심포지엄에서 ‘통일과 문화’를 함께 이야기하는 황석영씨와는 교유가 있었습니까.

“황석영씨의 작품을 읽은 적은 없습니다만, 황씨가 감옥에 있을 때 국제 앰네스티를 통해 석방을 촉구하는 연대 운동을 펼쳤습니다. 다른 나라의 작가들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방한과 함께 신작 ‘게걸음으로 가다’가 출간되어 국내에서 당신에 대한 관심이 크게 높아졌습니다.

“‘게걸음으로 가다’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전에 벌어졌던 대규모 독일인 희생 참사를 다룬 나의 최신작입니다. (독일인의 희생이라는 주제는) 그동안 금기시됐지만 이제는 이야기할 수 있는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34개 언어로 번역 출간을 준비하던 중 한국에서 가장 먼저 출간되었다고 들었습니다. 한국이 기록을 세운 것이지요.(웃음) 한국에서는 독일 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무엇보다 좋은 번역자를 찾는 게 급선무라고 생각합니다. 번역 지원을 통해서 외국 문학에 대한 관심을 높일 수 있을 것입니다.”

-통일로 가는 과정에서 작가는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습니까.

“동서독의 경우 이데올로기 정치 군사적으로 다르게 걸어왔지만, 문화적으로는 끊임없이 교류해 왔습니다. 동서독의 작가들은 꾸준하게 자주 만났지요. 남북한의 작가들도 이런 교류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정치가는 좋아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남북한의 문화적 동질성이 이데올로기에 의해 가려졌겠지요. 작가들이 이 동질성을 끄집어내서 상호 이해를 높이는 사적인 만남이 통일의 견인차가 될 것입니다. 남북 작가들의 적극적인 교류와 협력을 권합니다.”

-이번에 방북이 성사되지 못했는데요, 추후 방북 의향이 있으신지요.

“75번째 생일을 맞는 올 10월에 북한에 갈 계획을 세웠습니다만, 무산됐습니다. 앞으로 기회가 닿는다면, 또 건강이 허락한다면 꼭 북한을 방문하고 싶습니다.”

김지영기자

kimjy@hk.co.kr

■그라스 29·30일 '통일과 문화' 심포 참석

분단 상황에서 지식인은 어떤 목소리를 낼 것인가.

29, 30일 중앙대 아트센터 대극장에서 열리는 ‘국제 심포지엄’에서 백낙청 서울대 교수와 김문환 서울대 교수, 소설가 황석영씨가 귄터 그라스와 함께 ‘통일과 문화’를 논한다.

귄터 그라스는 29일 오후에 개최된 심포지엄에서 통독의 교훈 3가지를 설파했다.

서독인의 경멸로 ‘이류 독일인’이라는 자괴감을 가져야 했던 동독인에 빗대 그라스는 “부유한 남한과 가난한 북한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지배자의 위치에서 북한을 대한다면 독일과 유사한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통일을 서두르지 말 것을 당부하면서, “독일은 연합체라는 과도기를 거쳐 점진적으로 통일이 됐어야 했다.

남북한도 연방제로 가는 헌법의 토대 위에서 동등한 파트너십을 가질 때까지 충분히 교류한 뒤 통일로 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특히 “동서독이 이데올로기와 경제적 차이는 있었어도 문화적 분단이 이뤄진 것은 없었다”면서 문화적인 융합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라스는 “통일 뒤 서독은 동독의 문화 예술 행위를 국가예술로 폄하하는 잘못을 저질렀다”면서 “남북한이 통일에 앞서 문화적 결속을 다지는 것이 더 중요하고, 그것이 바로 작가들의 과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라스의 뒤를 이어 강단에 오른 백낙청 교수는 “분단이 항구화한 상태에서 남북이 평화롭게 공존하면서 각기 자기 식으로 순조로운 발전을 지속하는 데는 엄연한 한계가 있다”면서 “분단된 한반도의 체제적 특징이 통일을 요구한다”고 전제했다.

그는 “한반도에 자리잡은 분단 체제의 성격은 너무나 독특하다”면서 “한반도의 분단은 독일의 분단과 베트남의 분단이 복합된 형국”이라고 밝혔다.

백교수는 “통일의 과정에서 자본가 등 기득권층의 상당한 역할을 배제할 수 없음을 시인하는 노선을 택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현실적인 방안을 선택하는 한편, 민중의 요구가 최대한 반영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 이에 걸맞는 국가기구를 창안하는 것이 ‘분단 체제의 극복’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과정에서 문학, 예술, 학문 등 문화 각 분야가 떠맡을 몫은 결정적이라는 그의 주장이다.

소설가 황석영씨는 30일 ‘남과 북은 서로를 변화시킨다’는 제목으로 강의한다. 그는 베트남과 독일 통일의 과정을 거울로 삼아 제3의 길을 모색해야 할 것을 강조한다.

남한이 보다 자주적이고 민주화한 정부를 창출해야 한다는 것, 북한이 완고한 원칙주의에서 유연한 현실주의로 돌아서도록 해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김문환 서울대 교수는 김대중 대통령이 2000년 3월9일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행한 연설 ‘독일 통일의 교훈과 한반도 문제’를 요약하면서, 햇볕정책과 문화정책의 상관 관계를 짚을 예정이다.

김영화기자

yaa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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