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범한 영웅과 평범한 인간 위에 군림하는 신은 모든 것을 초월할 수 있는 능력과 지위를 지녔다. 그들의 신성(神性)은 자연의 힘과 동일시되거나 그것을 지배하는 힘으로 간주된다.그들은 세상과는 격리된, 산중이나 바다의 섬 혹은 천상에 거주한다.
그곳은 대개 별천지이거나 낙원이다. 시간의 파괴력조차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여 그들은 영원한 젊음 속에 산다. 그들은 인간으로부터 숭배와 경외를 받는다. 그들은 이 세상의 이면에서 사실상 인간의 삶의 모든 조건을 지배하고 조절한다.
모두의 삶과 관련된 기후 질병 전쟁 등의 상황으로부터 개인의 행 불행 등의 운명에 이르기까지. 신들은 이처럼 완전하지만 그들의 삶과 활동은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들은 기쁨과 슬픔을 알기에 서로 다투기도 하고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아울러 그들은 인간의 삶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잘잘못을 심판하고 합당한 상과 벌을 내리기도 한다.
언제쯤인지 모르나 아마 혼돈의 상태가 종식되고 거인 반고의 몸으로부터 천지 만물이 생겨난 후일 것이다.
신들은 천하를 나누어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는 제우스가 하늘을, 포세이돈이 바다를, 하데스가 지하세계를 각기 맡았다지만 중국은 동 서 남 북 중의 다섯 방향으로 나누어 각기 다른 신들이 다스렸다.
이 다섯 방향은 단순히 공간적인 구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만물의 다섯 가지 작용원리 즉 흙 쇠 물 나무 불의 오행(五行)과 상관되어 사실상 이 세상 모든 현상을 다섯 분야로 나눈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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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신과 음향오행설
동방은 태호가, 남방은 염제(炎帝), 서방은 소호(少昊), 북방은 전욱이 지배한다. 중앙은 황제(黃帝)가 지배했는데 신들 가운데서도 최고의 신은 바로 이 가운데를 지배하는 황제이다.
황제(黃帝)를 말하면 발음이 같은 황제(皇帝)와는 무슨 관계가 있을까 궁금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고대에는 황제(黃帝)를 황제(皇帝)로 부르기도 했다.
황제(皇帝)는 곧 황천상제(皇天上帝)의 준말이니 천상의 위대한 신이라는 뜻이다. 신중의 신 황제(黃帝)에게 합당한 호칭이라 할 것이다.
황제(皇帝)가 인간의 제왕의 의미로 사용되는 것은 진시황(秦始皇) 때부터이다. 진시황은 자신이 왕중왕(王中王)이기 때문에 최고신의 호칭인 황제(皇帝)로 불릴 만 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진시황 이후부터 모든 임금들은 자신을 황제(皇帝)로 칭하기 시작했다. 이 때 그들의 뇌리에는 힘과 권위의 화신인 황제(黃帝)의 이미지가 함께 자리했음에 틀림없다.
황제의 출생에 대해 한(漢) 나라의 역사가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 오제본기(五帝本紀)에서 그가 유웅(有熊)이라는 씨족 출신의 뛰어난 인물이었다고 기록하였다.
또 ‘제왕세기’(帝王世紀)라는 책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가 들판에서 기도를 올리다가 큰 번개가 북두칠성을 감싸는 것을 보고 잉태했다고도 한다. 위의 내용들은 황제의 신성(神性)과는 거리가 크다. 인간의 출생과 별로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황제를 비롯한 중국의 신들의 이러한 출생경위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있다. 한 가지는 신화 속의 상상적 존재인 신들을 사마천과 같은 후세의 역사가들이 모두 실제 있었던 인물들처럼 역사화시켰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대부분의 신화학자들로부터 지지를 얻고 있다. 또 한가지는 이와 정반대의 입장이다. 즉 황제 등의 신들은 본래 고대의 세력 있는 족장들이었는데 오히려 후세에 신격화되었을 뿐이라는 주장이다.
이 같은 주장은 기원전 3세기초 시칠리아 출신의 신화학자 유히메로스(Euhemerus)에서 유래해 유히메리즘(Euhemerism)이라고 불리는데 잘못된 신화해석 방식의 사례로 자주 거론된다.
그러나 고고학자ㆍ역사학자들은 가끔 신화에서 역사의 실마리를 찾아내는 데에 성공하기도 한다. 호머의 서사시에서 힌트를 얻어 트로이 유적을 발굴한 슐리만이 그 좋은 예이다. 이 두 가지 해석 방식은 신화 해석상의 영원한 딜레마이다.
황제의 형상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묘사들이 전해온다. 얼굴이 넷이었다니 인도의 창조신인 브라흐마와 같은 얼굴 모습이다.
이는 중앙에 위치하여 사방을 관찰하는 지배자의 형상이다. 누런 용의 몸체를 하고 있다고도 하였는데 누런 것은 그가 흙의 기운을 주재하기 때문이고 용인 것은 그가 구름 비 바람 이슬 서리 무지개 등 모든 기상 현상을 주관하기 때문이다.
특히 그는 벼락의 신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주신(主神)인 제우스의 무기가 벼락인 것과 일치한다. 벼락은 황제 제우스 등 주신들의 권력과 위엄을 과시하는 무기이다.
그가 진정한 지배자인 것은 인간뿐만 아니라 신들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분쟁도 조정, 해결하는 심판관이었고 모든 신들을 소집, 감독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지녔기 때문이다.
황제가 주로 거처하는 지상의 장소는 신들의 산인 곤륜산(昆侖山)이다. 곤륜산은 그리스의 올림포스산처럼 신들만이 머물 수 있는 성스럽고 거룩한 산이다.
이 산은 후세로 내려오게 되면 황제보다 서방의 여신 서왕모(西王母)가 거주하는 산으로 더 유명해진다. 그러나 천상 천하를 호령하는 황제의 권위는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끊임없는 투쟁의 결과였다.
황제는 처음 자기의 형님 뻘 되는 남방의 신농(神農)과 싸워 패권을 쟁취했고 나중에는 부하 뻘 되는 치우(蚩尤)의 도전을 힘겹게 물리친 끝에 최고신의 지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황제는 많은 자손을 두었다. 동해의 신 우괵과 북해의 신 우경 부자, 홍수를 다스린 곤(鯤) 우(禹) 부자 등의 이름난 신들 및 영웅들을 비롯 중원(中原)의 한족(漢族)과 변방의 여러 종족들이 황제의 후예였던 것이다.
곤륜산의 황제는 올림포스산의 제우스와 신들의 임금으로서 닮은 점이 많다. 앞서 살핀 바와 같이 벼락을 구사한다던가, 신들의 심판관이 된다던가, 많은 자손을 두었다던가 하는 점등이 공통점이다. 그러나 두 신의 성향은 완전히 다르다.
제우스가 미녀와 스캔들을 일으키기도 하는 등 인간적인 허점을 노출하는 반면 황제는 엄숙하고 거룩한 신적인 면모만을 보여준다.
제우스가 그리스 시대의 비교적 자유로운 인간형을 반영한다면 황제는 고대 중국에서 추구하던 유교적 성인의 모습을 제시해준다고나 할까? 중국인은 오늘날까지도 황제를 민족의 시조로 숭배한다. 그들 모두는 황제의 자손임을 자랑스럽게 말한다.
숱한 신들과의 투쟁을 거쳐 중앙의 주신이 된 황제는 다름아니라 스스로 세계의 중심에 살고 있다고 여겨온 중국인의 자존심이자 정체성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주변부에 위치한 한국ㆍ월남 등의 신화나 민속에서 황제는 거의 인기가 없다.
적지 않은 중국 신화의 모티프가 출현하는 고구려 고분 벽화나 한국의 민속자료에서 황제에 대한 표현이 전무하다시피 한 현상은 황제신화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한 민족의 고유한 이데올로기로서 기능했음을 알려준다.
갈수록 대륙으로부터의 황사 바람이 거세져 가고 있다. 이 바람은 마치 부활하는 황제신화의 표징인 듯 싶다. 이제 엄숙하고 거룩한 주신보다 따뜻하고 자애로운 모습의 황제로 거듭나 세계인의 사랑을 얻어보는 것이 어떨까.
■다섯 신과 음향오행설
동아시아 우주론과 현상론을 이해하려면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을 이해해야 한다.
이것은 우주나 인간의 모든 현상을 음ㆍ양이라는 상대적인 두 힘의 관계로 설명하는 음양설과, 이 영향을 받아 만물의 변화를 목(木) 화(火) 토(土) 금(金) 수(水)의 다섯 가지 기운 및 그 작용원리로 설명하는 오행설을 함께 묶어 이르는 말이다. 이 학설은 전국시대부터 유행하기 시작하여 한 나라 때에 절정에 달했다.
한 나라 때에 이르면 우주를 형성하는 이 다섯 개의 큰 기운을 신격화하여 숭배했다. ‘회남자’(淮南子)는 이 같은 철학에서 나온 오방신(五方神)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곳을 지배하는 큰 신은 황제(黃帝)인데 보좌하는 신인 후토(后土)가 노끈을 쥐고 사방을 다스렸다.
서방은 쇠의 기운이 왕성한 곳이다. 그곳을 지배하는 큰 신은 소호(少昊)인데 보좌하는 신인 욕수가 곱자를 들고 가을을 다스렸다. 북방은 물의 기운이 왕성한 곳이다
. 그곳을 지배하는 큰 신은 전욱인데 보좌하는 신인 현명(玄冥)이 저울추를 들고 겨울을 다스렸다.>
그들을 보좌하는 신들이 지닌 콤파스라든가 저울 곱자 등은 모두 사물을 측량하는 도구로서 이는 조절하고 다스리는 일을 상징한다.
다섯 방향의 신들의 직분과 기능이 이렇게도 정교하게 짜 맞추어 있는 것은 거기에 음양오행설의 철학을 담으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
/글 정재서 이화여대 중문과 교수 /그림 서용선 서울대 서양화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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