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을 앞두고 '개고기'이야기가 심심찮게 거론된다.'개고기를 먹는 것이 야만'이라는 서양인들의 비난이 문제를 일으키는 듯하다.
이런 비난에는 서구문명을 보편적이고 우월한 문명으로 상정하면서 '문명'과 '야만'이라는 이분법적 잣대를 휘두르는 서구중심적 태도가 배어 있다.
대다수 한국인들은 '개고기 먹는 것은 고유문화'라는 식으로 말하면서 상관하지 말라고 대꾸한다.
항변의 일환(?)으로, 어느 식당에서 외국인학교의 유럽 청소년들이 개고기를 시식하는 진풍경이 자랑스럽게(?) 신문에 난 적도 있다. 또 최근 어떤 민속학자는 개고기 식문화를 옹호하는 책을 출판하여 화제가 됐다.
'야만적'이라는 비난에 맞서 '고유한 문화'라고 반박하는 것은 사실 아귀가 잘 맞지 않는다.
고유한 문화라고 해서 다 정당하고 문명적인 것은 아니며, 잘못된 점은 당연히 고쳐야 하기 때문이다. '고유한 문화'라는 반론은 사실상 '야만적이지 않다', 곧 '부도덕하거나 수치스럽지 않다'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이 경우 반론은 두 가지로 짜여진다.
첫째, 애완견을 가족의 일원으로 생각하는 서구인들의 풍습을 존중할 수는 있지만, 보편적인 것으로 강요하지 말라는 주장이다.
둘째, 개고기 조리 과정에서 살생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최선의 방법을 택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른 항변은 동물에 대한 서양인들의 야만적인 풍습이나 관행을 지적하면서 우리의 야만과 그들의 야만을 상쇄시키는 것이다.
즉 개고기 먹는 것에 비견되는 서양인들의 야만적인(?) 음식문화나 잔인한 동물학대의 사례를 들어 피장파장이라는 식으로 반박하는 것이다.
거위의 지방간을 얻기 위해 거위에게 강제로 먹이를 먹이는 잔인한 풍습, 혐오스러운 달팽이요리, 영국인들의 여우사냥 또는 스페인인들의 투우 등을 떠올릴 수 있겠다.
이는 일면 우리의 풍습이 '야만적'일 수 있음을 시인하는 셈이기도 하다.
개고기를 둘러싼 공방에 담겨 있는 궁극적인 문제는 서양과 한국 사이에 존재하는 경제적·정치적·문화적 힘의 불균형이다.
서양인들은 서구문화와 비 서구문화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서구문명의 우월함 또는 비 서구문명의 열등함으로 전환시키고 그것을 '진실'인 양 전세계에 보급시킬 수 있는 막강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한국을 포함한 비 서구세계는 그것을 반박하거나 반전시킬 수 있는 충분한 역량을 아직 갖추고 있지 못하다.
이 대목에서는 한국의 대외적 이미지를 좌우할 수 있는 서양인들의 횡포에 현실적이고 신중하게 대처할 것이 요청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스스로 도덕적 열등감을 품고 그들의 주장을 보편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거나, 또는 그와 반대로 일부 서구인들의 편견에 지나치게 흥분할 필요는 없다.
전자의 경우에는 비굴한 식민성을 내면화할, 후자의 경우에는 폐쇄적인 민족주의로 흐를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개고기를 먹는 풍습을 옹호하기 위해 문화적 주체성이나 국가적 자존심까지 내걸 필요는 없다.
'개고기' 이외의 영역에서 그처럼 막중한 대의명분을 지키기 위해 진지한 노력을 기울인 적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과연 우리는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을까?
다행히 아시아권 국가들의 국력이 신장되고 서양인들의 타 문화에 대한 관용의 폭이 넓어짐에 따라 '개고기'가 월드컵의 성공적 개최에 커다란 걸림돌이 될 것 같지는 않다.
이제 우리는 개고기를 먹는 문화에 대해 굳이 부끄러워하거나 억지 자랑할 필요 없이 담담하게 처신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서양인들이나 다른 외국인들이 깊은 생각 없이 우리 문화에 대해 ‘야만적’이라고 속단하지 못하도록 총체적 역량을 키우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동시에 많은 서양인들이 개고기를 먹는 것에 대해 혐오감을 느낄 수 있다는 점도 겸허히 수용해야 할 것이다.
애연가가 담배연기를 싫어하는 손님 앞에서 조심스럽게 처신하듯이. 이것이 손님을 맞이하는 주인의 온화하면서도 기품 있는 자세가 아니겠는가.
강정인 서강대 정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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