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권택 감독이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은 것은 큰 경사다.평생을 영화만들기에 전념해 온 고집스런 예술가에게 바치는 찬사와 존경의 표시로는 최고의 예우이기 때문이다.
1962년 '두만강아 잘 있거라'라는 영화로 감독생활을 시작한 그의 행적은 현대 한국영화의 부침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60년대에는 그저 그런 액션 영화를 주로 만들었고, 70년대에는 반공이념을 앞세운 '국책 영화'나 이른바 '새마을 영화'를 만들었다.
당시 수많은 영화 감독이 걸었던 길을 그 역시 밟아야 했던 시절이었다.
그러다가 '왕십리' '짝코'같은 영화를 내놓으면서 남북분단에 따른 이념대립이나 급격한 도시화 과정에서 짓눌리고 뒤틀린 개인의 희생을 들여다보기 시작했고, '만다라' '아제아제 바라아제'같은 영화를 통해서는 국제적으로 주목받는 감독의 대열에 들어서는 계기를 만들었다.
80년대 한국영화의 국제무대 진출은 그의 영화를 통해서였다고 할 정도로 성과는 눈부셨다.
'씨받이' '아제아제 바라아제' '아다다' 같은 영화로 베니스, 모스크바, 몬트리올 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잇따라 수상하는 성과를 거뒀다.
국제경쟁력은 한국 영화와 상관없는 것이라는 인식이 팽배하던 시절에 '임권택 영화'가 거둔 성과는 그 벽이 넘을 수 없을 정도로 높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켜준 중요한 계기였다.
무엇보다도 주목할 임권택 영화의 특징은 한국적인 정서와 영상이란 어떤 것인가를 찾는데 치열하다는 점이다.
'서편제'는 판소리에 매달리는 소리꾼의 집념과 한, 남도의 풍경을 버무렸고, '춘향뎐'은 판소리의 리듬과 영상을 결합시켰다.
'취화선'은 오원 장승업의 예술가적 방황과 성취를 실경 산수화 같은 모습으로 그려냈다.
임권택 영화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결국 그는 자신의 영화 세계를 만들어냈고 그것을 한국적 영상으로 격상시키는데 이른 것이다.
칸 감독상 수상 영예는 감독 못지 않게 집념을 기울인 제작자 이태원, 촬영감독 정일성 같은 장인들에게도 돌려야 한다. 그들의 협력과 지지 위에서 임권택 영화가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축하는 여기까지다. 칸 영화제는 세계적인 규모를 자랑하는 영화제이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주최국인 프랑스의 이해관계가 스며있는 여러 국제 영화제 중의 하나일 뿐이라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칸 영화제 수상은 한국 영화의 성장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평가이지, 그것이 목표가 되어서도 안되며, 수상이 곧 한국 영화의 전체 수준이나 예술적 성취, 산업적 경쟁력을 모두 담보해주는 것도 아니다.
일본은 우리보다 먼저 50년대부터 베니스, 칸, 베를린 영화제는 물론 미국의 아카데미 영화상에서도 입상하는 성과를 거두었지만 지금의 활력과 자생력은 우리보다 낫다고 보기 어렵다.
각종 국제영화제의 상을 휩쓸다시피 하며 일본 영화의 국제화에 앞장서 '영화계의 천황'이라고 불리던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도 마땅한 제작자를 구하지 못해 곤란을 겪었던 경우가 한 두번이 아니었던 것은 상이 갖는 상징적 명예와 영화계 현실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를 드러낸 사례의 일부다.
중국이나 대만, 이란처럼 국제영화제에서 줄줄이 감독상이나 작품상을 받은 나라의 영화들도 전체적으로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지난 90년 배용균 감독이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란 영화가 스위스 로카르노 영화제 그랑프리를 차지했을 때 그것이 곧 한국 영화의 비약적인 성장으로 연결될 것이란 기대를 가졌지만 '쉬리'나 '공동경비구역JSA' 같은 영화들이 나오기까지 10여년을 기다려야 했다.
최근 한국 영화가 국제적으로 주목 받으며 위상을 한껏 높이고 있는 것은 예술적 성취보다는 상업적 활기에 더 크게 기대고 있다는 것을 냉정하게 주시할 필요가 있다.
칸 수상을 한국 영화의 에너지로 돌리지 못하면 그것은 한때의 영광으로 그칠 수밖에 없다. 칸 영화제 수상이 경사스러운 일이기는 하지만 그 수상이 한국영화의 목표이자 종점이 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다.
조희문 상명대 영화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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