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 이후 한국은 일본에게 문물을 전해 준 스승이었다. 그러나 '엎어지면 코 닿는' 지리적 인접성과 수백년을 얽혀 온 교류와 침탈의 역사는 양국의 사제(師弟)관계를 수시로 역전시켜왔다.문물의 일방적 전수를 받던 정신적 제자 일본이 청출어람(靑出於藍)의 기세를 보이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였다.
봉건국가의 틀에서 벗어나 산업국가로 거듭난 일본은 눈부신 근대화의 길로 나아간 반면 한국은 쇄국주의의 벽을 넘지 못했다.
■역전된 한일관계는 100년 넘게 지속돼 왔다. 낙후된 한국의 산업계는 일본의 기술과 마케팅전략을 토씨 하나 빼지 않고 그대로 모방했다.
특히 전자ㆍ철강ㆍ조선분야에서 일본이 축적한 노하우는 우리가 따라가야 할 금과옥조(金科玉條)였다.
오죽하면 소니 전자제품과 일제 코끼리표 전기밥솥이 일본 방문객의 필수품이었을까. 몇 년 전만해도 한ㆍ일간 기술격차가 15~20년 이상 차이가 난다는 데 이의를 다는 경제인은 없었다.
■최근 한국경제가 일본을 따라잡았다는 전문가들의 분석이 부쩍 늘었다. 우리나라 기업의 경영실적이 일본의 경쟁업체를 압도하면서 나온 얘기다.
삼성전자는 지난 해 순이익이 소니를 비롯한 일본의 10대 전자메이커 순익을 전부 합친 것 보다 많은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했다.
SK텔레콤의 순익도 NTT도코모를 훨씬 앞질렀다. 일본의 5대 고로(高爐)업체의 순이익 합계도 포스코에 못미친다. 한국의 조선사업의 수주실적이 일본을 앞지른 것은 이미 3년 전의 일이다.
■ 삼성전자에게 기술과 경영기법을 전수해 준 '스승 기업' 산요전기의 회장이 지난 달 '한 수 배우겠다'며 직접 삼성 일본 현지법인 사무실을 방문한 일도 있었다.
일본의 유통시찰단이 신세계 할인점 이마트를 찾은 것도 성공비결을 벤치마킹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아직 '일본추월'이 멀었다는 견해도 많다. 일본의 장기불황과 지지부진한 구조조정으로 인한 반사이익을 누리고 있을 뿐 실력차는 여전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한국 배우기는 양국의 사제관계가 재역전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징후다. 새로운 청출어람을 위해 우리 기업들이 주마가편(走馬加鞭)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창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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