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늘에 실 가듯이 정치에 돈이 따른다. '돈 안 드는 정치'는 이상적인 수사(修辭)이자 비현실적인 목표이다. '돈 덜 드는 정치'와 정치자금의 투명화가 현실적이고 바람직한 목표이다.우리 나라에서는 지금까지 돈 덜 드는 정치와 정치자금의 투명화라는 두 가지 목표가 너무 버거운 후진국이었다.
돈 덜 드는 정치를 위해 각종 선거에 쓰는 돈의 상한선을 정하고 이를 위반하면 엄중히 책임을 묻는 방식을 썼다. 정치자금의 투명화를 위한 장치는 없었다.
그 결과 선거가 거듭될수록 쓰는 돈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데 그 정확한 실상은 알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물론 선거를 전후하여 선관위와 사직당국이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정도로 온갖 선거자금 관련 사건과 소송이 줄을 잇는다.
그러나 확실한 물증이 잡히거나 내부고발자가 있는 극소수만 처벌되고 나머지는 흐지부지되고 만다. 불운한 '깃털'과 피라미만 쫓겨나고 거대하고 음습한 정치 자금판은 끄떡없이 잘 돌아가는 것이다.
이런 악순환을 깰 폭탄 공약이 이회창 후보에게서 나왔다. 정치자금 실명제 공약이 그것이다.
정치자금은 선관위에 신고된 정치인의 단일계좌를 통해서만 입출금 되고 선관위가 정치자금에 대한 계좌 추적권을 갖도록 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정치자금의 투명화가 정치 후진국을 벗어나는 핵심이요 이를 위해 정치자금 실명제가 필수적이라고 정치학자들이 오랫동안 주장해 왔다.
이번에 유력한 대선 후보의 하나가 이를 확실하게 공약한 것은 쌍수를 들어 환영할 일이다.
지금까지의 정치자금 비실명제는 혹자가 말하듯이 이 시대의 마지막 성역으로서 정경유착과 부정부패의 온상이 되어 왔다.
이를 깨는 이회창 후보의 대승적 결단에 경의를 표하며 찬사를 드린다. 그러나 한 가지 크게 아쉬운 점이 있다. 정치자금 실명제를 집권 공약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선 전에 실시하자는 제안이어야 했다.
각종 선거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것이 대통령 선거이다. 또한 대통령 선거에는 불특정 다수가 너무 많고 TV토론과 바람의 영향력이 너무 커서 다른 선거들보다 돈의 위력이 상대적으로 적다. 솔선수범하는 의미도 있다.
이 때문에 정치자금실명제는 이번 대통령 선거부터 실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아쉬운 점을 또 다른 유력 대선후보 노무현씨가 풀어 주기를 희망한다. 노 후보가 대선 전에 정치자금 실명제를 도입하자고 제의하고 두 후보가 이를 같이 추진하는 것이다.
정치자금실명제에 대해서는 국민적 공감대가 이미 폭 넓게 형성되어 있다. 선관위에 신고되는 계좌는 일반인에게도 공개되어야 한다는 밑그림을 정치학자들과 시민단체들이 일찍부터 그려 놓고 있다.
재계에서는 기업경영의 투명화가 진전되는 상황에서 더 이상 불법적인 정치자금을 낼 수 없다고 천명하고 있다.
김근태 의원은 용기 있는 고백성사를 통해 정치자금 투명화의 뇌관을 터뜨렸다. 썩은 정치판을 갈아 엎자는 밑바닥 정서가 노무현 돌풍을 몰고 왔다.
이제 정치자금 실명제에 대해 소극적인 후보가 왕따 당할 국민정서이다. 기득권에 안주하려는 정치인들을 독려하여 두 유력 후보가 이번 대선부터 정치자금실명제를 실시하는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털면 먼지 나게 되어 있는 과거를 더 이상 서로 들쑤시지 않고 이제부터 투명하게 새출발 한다는 정치권의 다짐과 대타협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두 후보는 역대 어느 대통령도 못한 정치개혁을 해 낸 큰 인물들로 역사에 기록된다. 합심하여 선을 이룬 두 후보를 통해 국민들은 우리 나라와 우리 정치의 내일에 희망을 갖게 된다.
이 후보가 되면 법치가 확실하게 이루어져 좋고 노 후보가 되면 정치개혁이 확실하게 이루어져 좋을 것이라는 희망 속에 오는 대선이 월드컵보다 더한 국민적 축제로 치러질 수 있다.
우리에게 정치 후진국에서 일거에 벗어나게 하는 이 '큰 정치'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안국신 중앙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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