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 4개월 동안 모진 병마에 시달리시던 시어머님이 끝내 삶의 끈을 놓으시던 그 날은 크리스마스를 하루 넘긴 날이었다.하얀 눈이 쌓여 악몽 같은 지난 세월을 송두리째 묻어버린 하얀 마당엔 크리스마스 캐롤 대신 스님의 진혼제와 이별의 장송곡(葬送曲)이 울려 퍼졌다.
엄숙한 향내음이 목탁소리에 실려 질긴 고부간의 인연을 끊는 이별의식을 끝으로 내 고난의 세월도 그렇게 막을 내렸다.
내 나이 스물 네 살, 겹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던 그 늦봄에 나는 하얀 백합꽃을 한아름 안고 흰 장갑 낀 손을 크고 힘센 손에 잡힌 채 그를 따라 멀고 험한 인생 길에 올랐었다.
시어머님과의 첫 상면의 설레임은 나에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분은 척추카리에스 환자였다.
텅 빈 연못가에 외롭게 서걱이는 갈대처럼 생기 잃은 뿌연 모습으로 자리에 누운 채 나를 맞으신 어머님은, 대소변마저 남의 손을 빌어야 하는 암흑의 늪 속에서 끝없이 헤매며 고통과 싸우고 있었다.
밤낮 없이 어머님을 괴롭히는 고통의 시간들…. 그것은 시집온 다음날부터 고스란히 나의 몫이기도 했다.
처음엔 애처로운 마음으로 시작했던 어머님의 병구완,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어쩔 수 없는 책임감으로만 변질되어 버린 현실은 나를 자꾸만 뒤흔들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따뜻했던 가슴은 수없이 금이 가기 시작했고, 내 몸의 남은 한 방울의 진액마저 소진시켰다. 그 와중에서도 나는 입덧을 시작했다.
죽어라 에워싸는 시련 속에서도 뱃속의 아이는 세상으로 나올 준비가 끝났다는 신호를 보내왔다.
그러나 지쳐버린 나의 육신은 오랜 입덧으로 영양분을 제대로 섭취하지 못하고 살아남기 위해 전쟁을 하느라 기진하여 아이에게 세상구경을 시켜줄 수 있는 힘이 없었다.
피가 모자라서 수술은 시도해 볼 수조차 없고, 자연분만도 어려운 상태였다. 포항에서 대구까지 기적만 바라보고, 죽음의 질주를 시작했다. 홑치마만 달랑 걸친 채, 아이의 머리가 노출된 상황에서 한시간 반을 달렷다.
팔월의 늦장마가 나의 혈관을 타고 수혈되는 링거줄처럼 줄기차게 차창을 후려쳤다. 350mg짜리 일곱 봉지를 수혈 받으면서 나는 혼미해져 가는 정신을 놓치지 않으려고 발버둥쳤다.
이윽고 터져 나온 아이의 첫 울음 소리가 기진맥진한 나의 고막을 통해 나의 몸 속으로 작은 파문을 일으키며 파고들었다.
그러나 하나를 얻기 위해서는 두 개의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내 몸 속의 2분의 1은 타인에게 받은 수혈이었기에 긁어도 긁어도 가려웠고, 피부는 나무 껍질처럼 상처투성이었다.
그리고 골반 뼈가 금이 가는 치명적인 후유증으로 내 몸은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더디게 흐르는 8개월 동안의 투병 생활을 하면서, 어두운 방에 갇혀서 누워만 계셔야하는 시어머님을 조금씩 이해해가기 시작했다.
불쌍하신 나의 시어머님, 스물 아홉에 혼자된 몸으로 삼남매 애지중지 길러내시고, 당신 몸 돌보지 않고 견디어 왔던 그 대가를 치르며 형벌 같은 생활을 눈물로 질척여야하는 그 어머님을 위해 무엇이든 해야겠다고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가까스로 몸을 추슬러 퇴원하던 날부터 나는 시어머님의 병에 좋다는 약은 다 구해와야만 했다.
오랫동안 독한 신약을 투여한 터라 장기가 기능을 잃어 대변은 젓가락으로 파내야 했고, 소변마저도 호스를 꽂고 뽑아내야만 했다.
약을 써도 차도가 없자 그때부터 시어머님은 친구 분들이 전해주는 민간요법 치료를 요구했다. 사람 뼈만 먹으면 바로 걸을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 약을 구해 달라는 어머님의 간절한 소망을 저버릴 수 가 없어 찬바람이 등골을 헤치는 야심한 밤에 남편과 함께 어린 아이를 등에 업고 누가 볼세라 도둑고양이처럼 화장터를 향했다.
온통 어두움만이 있는 무인지경의 두려움, 그것은 죽음 그 이상의 고통이었다. 화장터 아궁이 밑에 몸을 움츠리고 그물망 밑으로 흘려진 재를 더듬기 시작했다. 딱딱한 덩어리는 모두 주워 오지랖에 담았다.
나는 사지가 뻣뻣해지며 호흡이 금방이라도 멈추어 버릴 것 같이 마비되어 가는 자신을 느꼈다. 등뒤에는 추운 혹한인데도 불구하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순간 아이의 울음소리가 멀리서 아득하게 들려왔다.
아궁이 밖으로 뛰쳐나온 나는 그만 정신을 잃었던 모양이었다. 남편의 흐느끼는 절규에 나는 간신히 눈을 떴다.
민간요법은 끝이 없었다. 스쳐 지나쳐도 진저리가 치는 지네를 연탄불 뚜껑을 벌겋게 달군 뒤 뚜껑 위에서 구워야 했다.
뱀도 그런 방법으로 구워야했다. 벌겋게 달구어진 연탄 뚜껑 위에 눈을 감고 자루에 든 뱀을 부어놓고, 기어 나올세라 양은 세숫대야를 덮었다.
기어 나오려고 꿈틀거리는 뱀이 무서워서 울었다. 타죽어 가는 뱀이 불쌍해서 또 울어야 했다. 그러나 그걸 잡수시면 금방이라도 일어날 것 같은 시어머님의 기대를 나는 도저히 외면할 수가 없었다.
설령 허황된 기대로 끝난다 하더라도 어머님의 성화를 도저히 견디어 낼 재간이 없었다.
이렇듯 반복되는 나의 생활은 하루 하루가 지옥이었다. 이웃할머니들의 민간요법 약의 가짓수는 줄어들 줄 몰랐다.
혐오스런 민간요법 종류는 상상을 초월한 것들뿐이었다. 허리가 아픈 데는 똥소주만 먹으면 금방 낫는다는 둥 돼지쓸개가 특효라는 둥… 정말 감당하기 어려운 약들뿐이었다.
똥소주를 만드는 일은 뱀을 굽기보다도 지네를 굽기보다도 오히려 쉬웠다. 삽에다가 변을 고루고루 바른 후 양은 그릇에 물을 떠놓고 달구어진 삽을 물에 담궈 노랗게 우려낸 물을 그릇에 부어 갖다드리면 되었다.
그런데 이제는 나환자촌에서 파는 똥소주가 좋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나는 아이를 등에 업고 똥소주를 구하러 나서야 했다.
무쇠라도 녹일 듯한 칠월 말의 태양은 41kg의 아낙이 견디기에는 너무도 지독하였다.
꼬챙이처럼 마른 육신, 젖가슴은 말라붙어 우유 통을 들고 다녀야 했고, 아이는 더위에 축 늘어져 나의 등에 간신히 매달려있었다.
비포장 도로를 버스를 타고 두시간을 넘게 달려 약을 구한 다음 곧바로 돌아와야 했다. 등에 업힌 아이는 배가 고파 울음을 터뜨렸고 시골버스는 돌부리를 뱉어내며 요동을 치며 질주했다.
두 발 사이에 유리병을 끼우고, 한 손으로는 우는 아이를 달래던 중 쿵! 하면서 병이 넘어지고, 유리병은 의자 모서리에 부착된 쇠에 부딪히면서 깨어지고 말았다.
먼지 섞인 버스통로를 길게 여러 가닥 줄을 그어가며 똥소주는 앞뒤를 쫓아다녔고, 버스기사아저씨의 욕설은 나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지독한 분뇨 냄새는 버스 안을 가득 채웠고, 승객들의 아우성은 나의 심장 속에 못질을 해댔다. 젊은 년이 별 이상한 것을 다 들고 다닌다는 거침없는 욕설에 나는 더 이상 견디어낼 배짱이 없었다.
나는 기어이 참았던 울음을 터트렸고, 아이의 기저귀를 몽땅 꺼내어 버스바닥을 닦기 시작했다! . 그 혹독한 악몽의 시간동안 나와 내 아이는 얼마나 울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화롯불처럼 달구어진 뜨거운 눈물이 가슴속으로 작은 시냇물을 만들며 흘러내린다.
그러나 나의 시련은 끝이 없는 첩첩산중이었다. 아랫배에 심한 통증을 느끼며 산부인과를 찾았더니 자궁암! 손을 쓸 수 없는 상태란다. 있을 수 없는 현실 앞에 나는 분노했다.
“하필이면 왜 나예요? 다른 사람들은 잘도 살아가는데 왜 하필 나만 불행의 타깃이 되어야하는 거예요!”
쉴 틈 없이 들이닥치는 탁류에 남편은 맥없이 휩쓸려 떠내려가고 있었다. 모든 것을 빠르게 포기하는 남편이 무서웠다. 술로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자신을 더 이상 지탱하려 하지 않았다.
결국 어머님은 형님 네로 거처를 옮기고, 거듭되는 남편의 타락에 결국 나는 죽음을 계획했다. 나는 양주 한 병을 손에 들고 거센 파도가 퍼렇게 멍든 바위를 자꾸만 방망이질하는 방파제로 택시를 타고 달렸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자유, 나의 후각을 파고드는 비릿한 바다 내음, 오랜만에 만끽하는 자유의 묘미에 차라리 웃음이 나왔다. 마셔도 마셔도 술은 취하지 않고 정신은 더욱더 맑아졌다.
술을 마실수록 더욱 선명하게 떠오르는 아이의 얼굴이 몸서리치게 보고 싶었다. 철썩이는 파도가 나의 목소리를 삼켜 버릴! 때까지 나는 목놓아 울었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어머님을 향해, 악을 쓰며 욕설을 퍼부었다.
나의 입가에는 파도가 남기고 간 잔재들처럼 더러운 욕설의 거품들이 하얗게 쌓여갔다.
결국 나는 다시 집으로 향했다. ‘아이를 죽이고 나도 죽어야지….’ 나는 아이를 죽이기 위해 농약 종묘사에 들러 진딧물 약을 한 병 사들고 담담한 가슴으로 집을 향해 뚜벅뚜벅 저승사자처럼 걸어갔다.
천진난만한 나의 아이는 엄마를 보자 박꽃 같은 웃음을 머금고 재잘거렸다. 초점 잃은 멍한 눈으로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이를 놓고 갔더라면 얼마나 후회를 하게 될까? 대문과 방문을 걸어 잠그고, 설탕을 숟가락에 부어 살충제를 부었다. 그리고는 꼬옥 아이를 안았다. 아이에게 입을 벌리게 하고 약을 부으려는 순간, 아이는 입을 꼭 다물고 말았다.
“엄마, 먹기 싫어. 냄새가 고약해서 못 먹겠어, 엄마.”
아이는 나의 옷깃을 잡고 안 먹겠다고 애원했다. 아이의 볼기짝을 때리며 강제로 먹이려했지만 먹지 안겠다고 울음을 터트렸다.
이렇게 실랑이를 벌이다 소스라쳐 정신을 차렸다. 나는 아이를 끌어안고 대성통곡을 하였다. 너무 많이 운 탓인지 아이는 금방 잠이 들었다
‘불쌍한 내 새끼….엄마 없는 세상을 너 혼자 이 세상을 어찌 헤쳐나간단 말이냐..’
나는 그렇게 아이와 이별을 하고 한 장의 유서도 준비하지 않았다. 그리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죽을 수밖에 더 어쩔 도리가 없는 에미가, 아내가, 며느리가, 딸이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나는 주방문을 걸어 잠그고 부뚜막에 반듯하게 누웠다. 그리고 아이의 몫까지 농약을 마셨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환청으로 들리는 저승의 언어는 이승과 비슷했다. 코끝에 와 닿는 냄새는 천상의 향기가 아닌 지독한 살충제 냄새였다.
그런 환청에 시달린 지 며칠 내 귓가에 뚜렷이 들리는 소리는 분명 내가 그렇게도 진저리치던 이승이었다. 정말 야속한 세상이었다. 죽음의 평화마저도 나의 몫으로 가질 수 없단 말인가?
“오냐! 이 쇠 심줄 같은 운명아, 그렇다면 내, 보아란 듯이 살아주마. 살아서 이 고통의 칼날에 몸을 바치마. 내게 무엇을 더해도 나는 살아 너와 대결하리라.”
그렇게 나는 인생의 큰 오점을 남기며 다시 힘들고 긴 투병생활을 시작했다. 3년에 걸친 네 번의 개복(開服)수술, 줄기찬 생명력을 자랑하는 종양이란 놈은 걸핏하면 내게로 다가와 나로 하여금 그만 포기하자고 유혹해왔다.
그러나 나는 이미 아이에게도 가족들에게도 모두 죄인이 되어 있었기에 다시 자살을 시도할 생각 같은 건 이빨을 앙다물고 질겅질겅 씹어뱉었다.
긴 투병생활, 뼈를 깎는 듯한 방사선 치료, 숨을 쉴 수조차 없는 협심증으로, 갑상선으로, 알레르기….
오랜 방사선 치료로 간신히 버티고 있는 최악의 백혈구 수치…. 나는 걸어다니는 종합병실이었다. 이렇듯 힘겹게 병마와 싸우면서도 나의 삶은 조금씩 희망이 보였다.
방탕만 하던 남편이 조금씩 정신을 차리고 다시 어머님을 돌보고 내게도 자상한 남편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 해 겨울 동짓달 그믐날이었다.. 저녁을 먹고 밖이 으슥해지자 남편이 나에게 귓속말을 했다, 옷 두껍게 입고 따라오라고.
나는 노인의 눈치를 보며 아이를 재워 놓고 남편을 따라 나섰다. 깜깜한 그믐밤에 남편은 나의 손을 꼭 잡고 형산강 둑으로 향했다.
“오늘이 무슨 날인 줄 알아? 당신 생일이라구.”
나는 쿡 눈물이 치솟아 말없이 남편의 손을 잡았다. 그날따라 남편의 손은 몹시도 따뜻했다. 우리는 말없이 강둑 길을 따라 걸었다.
그 밤, 남편이 들려주는 생일 축하노래는 은하를 건너 별에게까지 닿았다. 나는 남편의 가슴에 기대어 한없이 울었다. 남편도 울고 나도 울었다. 결국 우리의 눈물은 까만 밤을 하얗게 씻어 내렸다.
긴 병마와 혹독한 시집살이도 그렇게 서서히 막이 내리고 남편의 지극한 사랑으로 나의 병도 조금씩 고개를 숙이고, 나는 엄동 설한을 지나온 새싹처럼 다시 소생했다.
운명은 순응하는 자는 등에 태우고 가고 반항하는 자는 끌고 간다고 했던가? 나는 내게 주어진 운명과 화목하지 못해서 그렇게 긴 세월동안 고난과 사투를 벌여왔던 것 같다.
지금 다시 그런 상황에 놓인다면 이젠 훨씬 다른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으련만, 내게 주어졌던 지난 세월은 어쩌면 나를 단련시키려는 신(神)의 뜻이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단련하지 않으면 정금같은 이 순간을 어찌 향유하였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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