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쪽 하늘에 붉게 타오르던 주홍빛 황혼이 서서히 사그라진 역 광장에 수은등이 하나 둘 불빛을 밝혀오기 시작했다.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이 마치 공포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푸르스름하여 섬뜩해 보였다. 해질녘, 이 시간이면 프랑스 파리를 출발한 고속열차(ICE)가 프랑크푸르트 중앙 역에 도착하게 된다.
이 시간을 맞추어 오늘이 사흘째, 우리 부부는 프랑크푸르트 중앙 역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내일이 6월 4일, 법원에서 남편을 출두하라고 통지가 온 날이다.
오늘만은 기필코 파리에서 탑승한 승객을 찾아 열차 표를 구해야했다.
1970년대 석유파동으로 남편 사업이 졸지에 부도가 나고 가세는 기울어져 회복할 기미가 없는 절망 상태에 다달았다.
남편과 나는 독하게 마음먹고 삼 년을 떨어져 지내기로 했다. 독일은 이민국이 아니기 때문에 삼 년 동안 독일 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를 하여 목돈을 만들어 브라질로 건너가서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하자는 큰 꿈을 계획하고 나는 독일 간호사로, 남편은 일년 늦게 브라질 이민 길에 올랐다.
브라질로의 직접 이민은 여러 가지로 제약과 절차가 까다로워 파라과이를 거쳐 브라질로 가는 길이 유일한 통로였다.
천신만고 끝에 유토피아의 꿈을 안고 이민 길에 오른 남편은 브라질 땅을 밟기도 전에 파라과이에서부터 꿈이 깨어지기 시작했다.
금방 브라질로 데려다 줄 것처럼 장담하던 안내자는 파라과이에 도착한 지 한 달이 지났는데도 이 핑계 저 핑계로 지연이 되었다.
불안해진 남편은 마음을 달래기 위해 파라과이의 수도 아쑨시온 시내를 돌아다녔다. 그때 신통하게도 길 건너 맞은편에 독일 루프트한자 여행사 간판이 남편 눈에 들어왔다.
근무처에서 생각지도 않던 남편 전화를 받고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지금쯤 브라질에 당도하여 쌍파울루 거리를 활보하고 있을 줄 믿고 있었는데 이틀 후 오후 2시 루프트한자 독일 비행기로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한다고 마중 나오라고 했다.
반가운 마음보다 참을성 없이 고 새 오려고 하는 자발 맞은 남편이 야속하고 얄미웠다. 하지만 그 마음은 잠깐이었다. 사정이야 어찌 되었던 간에 가슴이 울렁거리고 일이 손에 잡히지를 않았다.
얼마나 보고싶던 남편인가. 남편의 독일 생활은 그리 순탄치 못했다. 거주 할 수 있는 비자를 받고 입국을 해야 되는데 무 비자 여행으로 입국 신고를 했더니 3개월이 지나자 외국인 관청에서 출국하라는 통보가 왔는데 출국을 미루다 외국인 관청 직원에게 들킨 것이다.
바로 법원에서 출두명령이 내려졌다. 우리는 잠을 못 자고 고민했다. 우리 부부는 연구 끝에 생각 해 낸 것이 남편이 파리에 머물다가 임신 칠 개월 째인 내가 걱정이 되어 잠깐 열차로 방문했다고 둘러대기로 했다.
그 증거로 파리에서 왔다는 열차 표를 보여줘야 믿을 것 같은데 난감하기만 했다. 그런 연유로 우리 부부는 파리 출발 고속열차가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하는 시간에 때 맞춰 역 광장을 사흘간이나 방황했던 것이다.
6월 4일, 달 수에 비해 많이 불러온 내 배에 동정이 갔던 모양이었다. 판사는 뜻밖에도 남편이 3년 동안 독일에 살도록 체류를 허락한다고 했다.
동산 만한 배가 그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었다.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뱃속의 아기가 효도를 한 셈이었다.
이렇게 어려운 과정을 겪으며 남편의 독일 생활은 시작되었다. 그러나 정작 어려운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체류 문제는 해결되었으나 노동허가가 없어 어느 곳에서도 일자리를 구할 수가 없었다. 고맙게도 남편은 궂은일 마른일 가리지 않고 열심히 뛰었다.
여기저기 일자리를 찾아다니며 방안 도배 일부터 페인트칠까지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페인트 공사에 잡부로 일을 마치고 돌아온 날은 온 몸이 페인트 투성이었다.
그런 모습의 남편이 우습기도 했지만 코끝이 찡하여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참고 나는 너스레를 떨었다.
"여보! 벽에 바를 페인트를 자기 몸에다 다 바르고 왔는가 봐. 일당을 받기는커녕 페인트 값 내놓으라고 하겠어요. 총천연색 당신 꼴이 한량없는 서커스단 크라운 형님 같네."
"왜, 내 꼴이 뭐가 어때서?" 남편은 작업복 주머니에서 그날 받을 일당을 내 손에 쥐어주며 나를 끌어안았다.
남편의 믿음직한 팔과 복도 거울에 자기를 비춰보면서 씩 웃는 싱싱한 미소가 나는 보기 좋았다.
뱃속에 든 아들 덕분에 브라질 이민을 포기하고 우리는 독일 땅에 뿌리를 내렸다. 그 아들이 세 살이 되던 해에 남편은 노동허가를 받아 내가 일 하는 대학병원에 일자리를 얻었다.
환자 수송을 맡은 일이었는데 독일 말이 시원찮은 남편한테는 아주 적합한 자리였다. 외국 땅에서 남편은 변변치 못한 병원 운전사로, 나는 간호사 일 망정 우리는 쉬는 날 오붓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고 휴가 때는 지중해로 장거리 여행도 했다.
행복이란 작은 소망이 이루어지는 즐거움에서 시작되는 것 같았다. 늦게 낳은 아들의 재롱을 보는 재미 또한 톡톡해서 타국에서 사는 고달픔도 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어찌 알았으랴, 시냇물 흐르듯 잔잔하던 우리가정의 평화는 오래가지 못하고 뜻하지 않은 불운의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감기가 오래도록 괴롭힌다고 푸념을 늘어놓던 남편의 몸 속에 암 세포가 맹렬한 기세로 퍼지고 있었다.
4월 마지막 날, 싸늘하게 식어 가는 남편을 끌어안고 나는 하나님을 목놓아 불렀다.
남편은 독일인들 무덤 사이에 누워 있다. 독일 땅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 그토록 고심했던 남편, 그 소원은 남편을 위해 폭 1m, 길이 2m의 영원한 독일 체류를 남겨주고 말았지만 남편이 묻힌 이 타국 땅이 낯설지 않고 차차 정이 가기 시작했다.
이제는 햇볕 따사롭고 봉숭아 꽃이 고운 남편 무덤 가에 앉아서 생전의 애창곡을 불러주는 나의 가슴도 평화롭고 훈훈하다.
“백마강 다-알밤에 물새가 우- 울어...” ‘여보! 2절은 내가 부를까?’-- 남편의 음성이 귓가를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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