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2때였다. 부도가 나고 많은 경험을 했다. 명절이면 늘 동네 사람들로 북적이던 우리집에 밤낮없이 빚쟁이가 드나들었다.여기저기 가구마다 빨간 딱지가 붙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집은 경매로 팔렸다. 슈퍼마켓과 미용실을 경영하시던 엄마는 작은 호프집을 얻어 장사를 시작하게 됐다.
엄마가 생계를 꾸려가면서부터 아빠는 점점 더 무능해지셨다.
대학에 입학하던 해 나는 엄마와 크게 다투게 되었다. 엄마는 가정형편을 생각하지 않고 지방대에 입학하겠다고 하는 나를 이기적인 아이로 생각했고, 나는 집안형편을 생각해 수도권 전문대학에 진학해 조금이라도 빨리 돈을 벌어오기를 바라는 엄마를 원망했다.
대학생활, 그 시간을 떠올리면 ‘치열하다’라는 딱 하나의 단어가 떠오른다. 장학금을 타려고 공부도 열심히 했다. 학교에서는 4년 내내 매점 아르바이트를 했다.
아르바이트가 끝나면 밤 10시 30분, 남들이 잠잘 준비를 하는 시간부터 리포트와 학과공부를 시작했다. 힘겨웠지만 즐거웠다.
내가 그렇게 대학시절 단꿈에 젖어 있던 동안 우리집의 상황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남동생이 대학에 입학하던 해 어려움은 극에 달했다.
호프집에서 버는 돈으로 일수를 찍어가며 아들의 대학 입학금을 마련했던 엄마는 그때 많이 지쳤던 것 같다. 엄마는 아빠에게 비수가 될 말도 함부로 했고, 입도 거칠어져 남동생과 나에게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당신의 몸이 아파서 신경이 예민해졌던 것 같다. 쉽게 피로를 느끼고, 다리 저림과 심한 갈증을 호소하는 등 건강에 적신호가 켜지게 되었던 것이다. 병원에서 당뇨병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당뇨병성 망막증이라는 무서운 합병증이 시작되고 있었다. 술과 담배는 자살행위라는 경고를 받고도 생계 때문에 호프집을 그만두지 못하고 1년을 더 운영하셨다.
그때 난 엄마와 사이도 좋지 않았고, 학교생활에 정신이 없어 집에 거의 가질 않았다. 때문에 우리집 사정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가 없었다.
이듬해 2월, 우리가족은 뜻밖의 사고를 겪게 되었다. 비록 말년에 가족을 힘들게 했지만 나에게 건강한 도전정신과 성실한 삶의 태도를 가르쳐주셨던 사랑하는 아빠가 우리 곁을 떠나신 것이었다.
영안실 앞에서 아빠의 함자를 보고 나서야 이게 꿈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바로 전날 12시 경 나는 아빠와 마지막 통화를 했다.
나랑 ‘굿나잇’ 인사를 나눈 후 엄마와 함께 맥주를 마시러 나가셨다고 했다. 오랜 만에 기분 좋게 노래방에서 노래도 불렀다고 했다.
집으로 돌아 가는 길에 발을 접질리기라도 한 듯 넘어지면서 아빠는 엄마 앞에서 두 눈을 감으셨다고 했다. 너무나 급작스러운 일이었다.
아빠를 보내고 엄마는 많이 편찮으셨다. 내 어깨에 기대어 넋을 놓고 있는 엄마를 보며, 엄마의 인생이 가엽게 느껴졌다.
그리고 엄마의 행동들이 하나씩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깟 대학입학 문제로 내가 왜 그렇게 엄마를 원망했는지 후회스러웠다.
엄마 입장에서 보면 사는 게 전쟁 같은 데 나의 대학입학은 사치처럼 느껴졌을 수도 있었다. 장례를 치르고 엄마는 쌓인 피로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 때서야 남동생과 나는 엄마의 병세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게 됐다. 엄마는 당뇨병 합병증으로 시력을 거의 잃은 상태였다.
눈이 침침한 정도가 아니었던 것이다. 담당의사는 엄마의 왼쪽 눈동자의 반 정도가 이미 빛도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라고 했다.
엄마는 ‘우리 딸 웃는 모습이 얼마나 예쁜데, 이게 언젠가 안보이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혼자 운 적도 많았다고 하셨다.
왜 진작 말하지 않았냐고 하니까 걱정하면 공부하는 데 방해될까 봐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고 하셨다. 그런 게 엄마의 사랑이었던 것이다.
당신의 건강이 어떻든, 담배연기 자욱한 호프집이 시력에 얼마나 치명적이든 간에 자식이 우선이었다. 자식이 하고 싶은 공부를 하게 해주는 것이 더 중요하셨던 것이다.
사랑하는 엄마에게 내가 모질게 굴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지난 1월에 엄마는 영등포의 유명한 안과에서 ‘당뇨병성 망막증’ 수술을 받았다. 일시적일 수도 있다지만 다행히 수술 경과는 좋았다.
병원에 입원해 있던 2주일 동안 나는 엄마의 간병인이 되었다. 병원에서 회사로 출근을 했다가 칼 퇴근을 해서 병원에 갔고, 저녁식사를 마친 엄마와 산책도 하고, 잡지를 읽어드리기도 했다.
엄마와 난 이십 여년 나눈 것보다 2주간 더 많은 얘기를 했던 것 같다. 여전히 잘 보이지 않지만, 아침이면 기어코 일어나 출근하는 아들딸에게 아침상을 차려주시는 엄마.
뜨거운 것을 들거나 만질 때 마다 조마조마 하지만 엄마의 시력이 남아있는 동안 자식에게 무엇이든 해주고 싶은 당신의 마음을 알기에 말리지 않는다.
아빠가 하늘로 가시면서 철없는 딸에게 엄마의 소중함을 깨닫게 도와주신 것 같다. 아빠께 생전에 해드리지 못한 것까지 엄마한테 모두 해드릴 생각이다.
엄마를 외롭게 했던 7년을 앞으로 보답해 드릴 작정이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