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쎄, 나는 왜 '문학 따위'를 아직도 붙들고 있는지… 이 질문은 아직도 내게 신선하고 유효한가를 나는 오늘 밤 새삼 되묻고 있다.지난 1962년 ‘사상계’ 신인문학상을 받은 이래로 나의 문필 생활은 올해로 어언 40년이 되었고 이제 곧 환갑인 나이에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초등학교 시절에 어머니는 전후의 어려운 시절임에도 내게 책을 사다 주셨고 나에게 일기를 쓰도록 권하셨다. 영등포의 야시장 골목에 나가면 난리 중에 생계가 어려워진 집이나 빈 집에서 쏟아져 나온 개인 서가의 책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헌 책을 팔기도 했지만 대개는 노천에 책꽂이를 늘어놓고 대서점을 하는 데가 많았다. 나는 누나들과 함께 책꽂이 사이를 누비고 다니며 날마다 닥치는대로 책을 빌려다 보곤 했다.
해방 공간에 나온 갖가지의 세계명작 번역서로부터 대중소설에 이르기까지 거의 몇 개의 책꽂이를 모두 훑었다.
다락과 마루방에 엎드려서 읽다가 유리창 너머로 변하고 사라지는 풍경들을 눈에 익혔다. 여의도 비행장의 프로펠러 소리며, 공장의 회색 담벽이며, 샛강의 푸른 들판이며, 그 속에 피어나던 꽃다지, 자운영과, 까마중과, 뱀딸기가 책 속의 다른 세상들과 어우러졌다.
글짓기 행사에서 몇 차례 상을 받고 나서, 칭찬을 받은 어린 것이 언제나 그렇듯이 이담에 크면 뭐가 될거냐고 물을 때마다, 나는 작가가 되겠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하곤 했다.
당시에는 작가나 소설가라는 사람들이 무엇을 하는지 뚜렷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글 쓰는 일이 학과 공부에 비해서는 그다지 대수로운 짓이 아니라는 점은 학부모와 선생님으로부터 여러 차례 확실하게 가르침을 받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미 내 눈과 가슴에 그 어떤 기관이 생겨나 있었던 것을 미처 모르고 있었다. 그건 ‘인문적’이라고 표현을 해야할지, 아무튼 ‘사람 살이’에 대한 따스한 온기와 물기 같은 것이 스며든 무슨 투명한 렌즈 같은 것이었다.
빛을 투과해서 여러 색깔을 나누어 보여주는 것이 프리즘이라면 그 비슷한 감성의 기관이 생겨났을 거라는 얘기다. 그것은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일차적으로는 세계와 인간의 경험을 반영한 갖가지의 책을 읽음으로써 형성되었을 것이다.
이 갈피 갈피마다, 저 여름날 도로의 움푹 패인 물웅덩이에 번진 기름이 오색 빛으로 빛나던 순간이나, 아침에 깜짝 놀라게 몰래 오신 손님처럼 내린 첫눈이라든가, 인천상륙작전이 계속되던 캄캄한 밤 하늘의 야광탄의 불꽃이나 먼 우레 같던 포 소리들, 어린 거지 남매의 때 묻은 손 위에 걸린 더러운 밥 찌끼가 담긴 깡통이나, 무릎이 앙상하고 눈이 빛나던 검정치마 입은 단발머리 소녀가 내밀어준 짭짤한 누룽지라든가, 하는 생생한 삶의 편린들이 이 프리즘을 통과해서 나를 성장시켰다.
그리고 미지의 세상과 새로운 체험에 대한 강렬한 호기심은 바로 이러한 기관이 내 몸과 마음을 부추긴 때문이었을 것이다.
문학이 좋기는 하지만 그렇게 사회로부터 존경을 받는 일은 아니라는 점은 이미 청소년기에 눈치를 챘던 모양이다. 그것은 숱한 난리를 겪으며 어렵게 생존을 이어온 어른들의 영향도 컸으리라.
‘글 쓰는 일’은 ‘직업’이 될 수 없는 것이었다. 낚시, 등산, 독서처럼 취미란에나 적을 수 있는 일거리였다.
하지만 이렇게 ‘글 쓰는 일’은 나뿐만 아니라 다른 이의 삶에도 매우 중요한 일이라는 느낌 때문에 도중에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내가 늘 하는 얘기지만 ‘문학’은 마치 사랑하는 상대처럼 너무 가까이 다가가려고 하면 전체적인 형상이 보이질 않았다. 나는 곁눈질도 하지않고 그냥 ‘놓아’ 버렸다. 갈테면 가라지… 하고 중얼거렸겠지. 그는 아마도 내가 ‘거리를 두고’ 놓아버린 뒤에도 늘 내 주변을 맴돌았을 터이다.
베트남 전쟁터에서 돌아온 뒤에 나는 ‘자아’라는 꾸며진 가상의 껍질을 벗고 사회와 만난다. 그때에 내 등 뒤에서 작은 속삭임 소리가 들려왔다.
“이봐, 나 아직 당신 등 뒤에 있어.”
나는 그것과 새삼스럽게 재회한다. 그로부터 그것과 나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동행을 계속했다. 우리는 죽음도 이별도 함께 겪었다.
나는 무명 작가 시절의 가난을 견디면서 ‘글 쓰는 일’은 모든 다른 사람들의 삶이 그렇듯이 시장 가운데서 하나의 생업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나는 무엇보다도 ‘직업 작가’이며 프로 글쟁이다.
하늘로부터 천형의 벌을 받은 것도 아니고, 글줄 좀 쓰다가 늙은 글쟁이들이 고민하는 쌍통을 하고, 무슨 특별하고 월등한 생산을 해낸 것처럼 엄살을 부리는 꼴은 정말 차마 못보아 주겠더라.
스패어 운전수를 하다 정식 운전수가 되고, 개인택시 허가를 얻어 육십이 넘어서야 사남매를 대학 졸업시키고, 마나님과 임대 아파트에서 산다던 어느 고참 택시 운전사의 너털웃음은 겸허하고 당당하다.
나는 이러한 직업의식과 더불어 ‘글 쓰기’가 사람의 삶과 관계되어 있음을 뼈저리게 생각하고 있다. 이건 일종의 직업 윤리 같은 것이다.
사람의 삶에 깊숙이 관계된 일을 하는 비슷한 처지의 의사라든가 교사라든가 종교인이라든가 더욱 넓게는 남보다 더 많이 배운 지식인이라든가 하는 부류들에게 그러한 직업 윤리는 각자의 선택이지만 원칙적인 문제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글을 쓰면서 이러한 최소한의 원칙을 지키려고 할뿐이다. 나는 잃어버린 것도 많지만 마음을 비우고 놓아버린 탓에 얻은 것들도 많았다.
나는 원래가 왼손잡이였다. 교육열이 대단한 모친에게서 왼손의 사용은 잘못이라는 가르침을 받았고 왼손을 사용할 때마다 호되게 얻어 맞았다.
그래서 오늘날 글씨 쓰는 것과 밥 먹는 것만은 오른손으로 익숙하게 해낸다. 하지만 공 던지기며 싸울 때 주먹이 나가는 것이며 뜀박질을 하려면 왼쪽이 본능적으로 익숙하다.
교육은 받았으나 그것은 일종의 억압이었다. 나는 천성적으로 억압과 제한에는 저항한다. 그리고 그것을 뛰어 넘어가 버린다. 그리고 나의 이런 행위가 다른 이들에게도 전해져서 모두 자유로워지기를 기대한다.
글쎄, 나는 왜 문학을 할까?
세상을 돌아보면 지금 나를 둘러싼 온 세상의 사람들은 아마도 틀림없이 백 년 뒤에는 지상에 한 사람도 살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저들은 모두 사라지고 후세의 전혀 모르는 새로운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겠지. 세상은 좀 더 나아져 있을까. 그들은 나를 조금은 기억이나 할까. 우리가 꿈꾸었던 가치들은 여전히 귀한 것으로 남아 있을까.
어디선가 보았던 모자이크 벽화처럼 사람마다 자신의 사금파리 파편들을 붙여 나가면서 형상은 차츰 구체화할 것이리라. 우리가 기획했던 그림은 어느만큼 완성에 가까워질 것인가. 그 벽의 한 모퉁이에 나의 손짓이 또한 자취를 남겼으면 한다.
세계는 지금 지난 세기에서 넘어온 미완의 숙제들이 고통이 되어 우리를 옥죄고 있다. 우리는 아마도 문명의 변화하는 이행기에서 살다가 죽게 될 것이다. 길고 고통스런 이행기를 말하는 이들이 많다.
나는 내 독자들이 있어 운이 좋은 축에 든다고 생각한다. 나는 강력하게 그들의 편을 들게 될 것이다. 나는 편들기가 글쟁이의 업이라고 생각하니까.
나는 사람들의 삶이 보다 넉넉하고 자유로워지기를 바라고 서로를 존중하며 사랑이 마르지 않기를 바란다.
뒤늦게도 나는 오늘 문학청년이다. 그러므로 이 질문은 나를 새삼스럽게 가슴이 뛰게 만든다. 글 쓰는 일은 아직도 나에게는 사랑을 확인하는 작업이다.
사랑은 나를 죽을 때까지 지치지 않게 할 것이다. 그리고 사랑은 나의 실천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언제나 앞서가고 있잖은가.
● 연보
▲1943년 중국 창춘(長春) 출생
▲1962년 경복고 재학중 '사상계'신인문학상에 단편 '입석 부근' 입선 등단
▲1970년 동국대 철학과 졸업,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탑' 희곡 '환 영의 돛' 동시 당선
▲1989년 북한 조선예술총동맹 초청방북, 이후 미국 독일 체류
▲1993년 귀국, 국가보안법 위반 수감, 1998년 사면 석방
▲중단편집 '객지' '가객' 희곡집 '장산곶매' 장편 '장길산' '어둠의 자식들' '무기의 그늘' '오래된 정원' '손님' 방북기 '사람이 살고 있었네' 등
▲만해문학상(1989) 이산문학상(2000) 단재문학상(2000) 대산문학상(2001)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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