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5월23일 시인 김광섭이 72세로 작고했다. 김광섭은 함북 경성 출신이다. 호는 이산(怡山).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모교인 서울 중동중학교에서 10여년간 교편을 잡았다. 문단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1927년 순문학 동인지 ‘해외문학’의 창간에 참여하면서다.이산은 좌익 사상에 눈길을 주지 않은 지식인으로서는 드물게 일제 말기까지 훼절하지 않았다. 그는 창씨개명에 공공연히 반대해 3년8개월간 옥고를 치르는 것으로 그 시절을 보냈다. 정치적 우파의 심리적 고갱이가 견결한 민족주의라면, 이산은 그 말에 값하는 진짜 우파 지식인이었던 셈이다.
해방 뒤에는 이승만 대통령 공보 비서, 대한신문사 사장, 자유문학자협회 위원장, 경희대 교수 등 관계ㆍ문화계ㆍ언론계ㆍ학계를 두루 걸치며 시작(詩作) 활동을 병행했다. 문학과 지성사는 1989년 이산의 문학과 삶을 기려 이산문학상을 제정했다.
시 부문의 제1회 수상작으로 노동자 시인 백무산의 시집 ‘만국의 노동자여’가 뽑혀 화제가 된 바 있다.
이산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성북동 비둘기’(1968)는 관조적 지성과 서정의 결합이라는 이산 문학의 특성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돈다//(…)// 예전에는 사람을 성자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사람과 같이 평화를 즐기던/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
고종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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