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무덤을 발굴할 때면 “이번에는 어떤 유물이 나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옛 이야기를 들려줄까” 하는 기대에 마음이 설렌다.경주시에서 약 4km 떨어진 경주-포항 산업도로 변에 위치한 용강동 고분 발굴에 참여한 필자의 심정도 그랬다.
‘고려장’ ‘개무덤’ 등으로 불리며 심하게 훼손된 채 방치돼있던 이 돌방무덤(석실묘)은 1986년 경주 지역 향토사학자들의 조사 결과, 통일신라 시대 왕릉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지면서 주목을 받게 됐다.
경주고적발굴조사단(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은 그 해 6월 16일 비가 억수같이 쏟아붓는 가운데 개토제를 지내고 본격 발굴조사를 시작했다.
봉분 조사에 이어 이뤄진 돌방 내부 조사에서 토용(土俑ㆍ흙으로 빚은 인물상) 토마(土馬), 청동십이지상 토기 등 유물이 속속 발견됐다.
가장 관심을 끈 것은 돌방 가운데 놓인 시상(屍床)을 향해 도열해있던 인물상들. 머리에 복두를 쓰고 홀(笏)을 잡은 문인상, 대련 장면을 담은 무인상, 두 손을 공손하게 모은 여인상 등 총 28점이 출토됐다.
특히 이들 인물상은 그동안 출토된 토우(土偶)들에 비해 크기가 크고 얼굴 표정이나 의복 형태, 머리 모양 등이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돼있어 당시 복식사를 연구하는데 획기적인 자료로 평가됐다.
이 가운데 간판 스타는 서역인으로 보이는 수염 기른 문인상.
한국일보에 혼란스러웠던 당시의 정국을 빗대, 세상이 하도 시끄러워 조상님이 편히 쉬지 못하고 무덤에서 나와 후손에게 정신차리라고 훈계하게 됐다는 내용의 만화가 실릴 정도로 관심을 모았다.
토용들 가운데 가장 먼저 출토된 것은 머리 없는 미녀상(머리 부분은 끝내 찾지 못해 미모는 알 수 없지만 당시 발굴단은 그렇게 불렀다)인데 흙이 묻은 상태에서 잘못 보고 토제 남근(男根)이 발견됐다고 보고했다가 정정하는 등 웃지 못할 해프닝도 많았다.
토마 말 안장 안쪽에서 발견된 지문도 관심을 끌었다. 당시 서울시 경찰국 감식계에서 지문 감식을 한 결과, 주로 예술가들한테서 나타나는 지문형이라는 의견이 나와 제작 당시 찍힌 도공의 것으로 추정됐다.
복식 형태 등으로 미뤄 이 무덤이 7세기 말에서 8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만큼 이 지문은 국내 최고(最古)의 지문인 셈이다.
무덤 주인 것으로 보이는 치아도 발견됐다. 그러나 분석 결과, 나이가 10대 초반에서 20세 사이일 것으로 추정됐을 뿐 성별, 사인 등 구체적인 사항은 밝혀지지 않았다.
10대에 요절한 비운의 주인공 곁에서 1,200여년의 세월을 묵묵히 지켜온 토용들은 지금도 경주박물관의 진열장 안에서 후손들을 향해 무언가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우매한 후손들은 아직 그 뜻을 헤아릴 수 없으니 답답할 따름이다.
무덤의 복원, 정비가 끝나고 추석 때 청주와 오징어를 들고 차례를 지낸 후로는 바쁜 일상을 핑계 대며 한 번도 찾아보지 못해 늘 죄송한 마음이다.
/신창수 국립문화재연구소 유적조사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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