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원일씨의 화갑을 맞아 평론가 권오룡씨가 엮어낸 ‘김원일 깊이 읽기’(문학과지성사 발행)라는 책의 끝머리에는 작가의 시들이 실려 있다.대개 ‘잠언’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데서도 드러나듯, 이 단형시들은 온전히 정제한 작품이라기보다 섬광처럼 떠오른 생각들을 서둘러 글로 낚아챈 메모에 가깝다.
그러나 이 짧은 메모들은 지난 40여년 동안 20세기 한국사를 가족사 속에 수렴하며 웅장한 문학적 성채를 쌓은 이 대형 작가의 깊숙한 마음자리를 흘끗 보여준다.
소설은 흔히 체험의 ‘변형’이지만, ‘체험’의 변형인 것도 엄연하다.
김원일씨의 많은 작품에 실체성이 마모된 채 흐릿한 흔적이나 아스라한 기억의 형태로 등장하는 아버지는 작가에게 ‘해방과 전쟁 사이/ 말갈기 같이/ 어둠의 산야를 달리다/ 젊은 나이에/ 이슬로 마른/ 아ㆍ버ㆍ지/ 한 번도 불러본 적 없는/ 두려운 그리움/ 이슬’(‘아버지’에서)이다.
이 부재하는 아버지는 6ㆍ25 전쟁 때 가족을 남쪽에 남겨두고 북으로 가버린 사람이다.
연좌제의 그늘 속에서 작가에게 늘 ‘두려운 그리움’이었던 아버지가 없었다면, 또는 그 아버지가 성장기의 작가 곁에 실재했다면, 김원일씨는 소설가가 되지 않았거나 지금과는 매우 다른 소설가가 되었을지 모른다.
작가의 소설들 속에서 강인하고 매몰찬 여성으로 등장했던 어머니는 ‘내 귀밑머리 셀 때/ 눈감으신 어머니/ 귀밑머리에 눈물 머무니/ 지난 말씀 다시 적신다/ 정직한 사람이 되어라’(‘잠언3’에서)고 회억된다.
김원일씨 자신이나 그의 실제(實弟)인 소설가 김원우씨의 회고로 미루어보면, 그 어머니는 김원일씨를 가혹한 매질로 키웠던 듯하다.
그런 어머니에 대한 불편한 감정은 ‘마당 깊은 집’을 비롯해 김원일씨의 작품 여러 군데서 드러난다.
그 어머니를 추억하며 작가가 끌어낸 ‘정직한 사람이 되어라’는 밋밋한 가르침은 김원일씨 소설들이 내장한 강건한 윤리성, 그 사기(邪氣) 없되 슬프고 더러는 억압적인 청정의 근원인 것 같기도 하다.
‘잠언4’라는 제목을 단 ‘눈 가자 귀도 가고/ 벙어리 삼중고에/ 수족마저 못 쓰면/ 동무 삼아 치매와 놀다/ 마지막 식물인간 되어도/ 혀는 맛을 안다나/ 징그러워라/ 생명의 마지막 욕망’을 읽다 보면 ‘슬픈 시간의 기억’의 어떤 인물들이나 ‘아우라지 가는길’의 자폐증 청년의 얼굴이 활자 위에 내려 앉는다.
작가는 ‘불은 타올라 높게 솟아 혁명이 되고/ 물은 바다로 낮게 흘러 소금이 된다’(‘잠언2’에서)고 말했다.
김원일씨는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에 ‘불의 제전’이라는 제목을 붙인 바 있지만, 전쟁과 분단을 휘감고 흐르며 그의 드넓은 문학 공간을 채워온 것은 반짝이는 삶의 소금을 만들어내는 물이었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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