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 속에서 창조된 하늘과 땅이 온전히 자리를 잡자 다시 그 대지 위에 온갖 만물이 번성하고 인간이 마지막 빈 자리를 채우게 되면 바야흐로 신과 영웅들이 활약하는 본격적인 신화시대로 접어든다.영웅이란 무엇인가. 그는 신의 신성한 자질과 인간의 범용한 속성을 아울러 지닌 신과 인간의 중간적 존재라고나 할까. 그는 신과 인간의 결합에 의해 태어난 반신반인적(半神半人的) 존재이거나 신의 혈통을 이어받은 뛰어난 인물이다.
영웅들의 이야기는 신들의 이야기보다도 더욱 박진감있고 실감나게 우리의 심령을 자극한다. 완전한 존재인 신에 비해 반쯤은 불완전한 존재인 영웅의 이야기는 모험과 갈등이 있고 그것을 극복하는 승리의 쾌감이 있다.
따라서 우리네 평범한 인간들도 함께 공감하며 초월과 비상(飛翔)의 꿈을 꿀 수 있기 때문이다. 영웅, 그는 미완에서 완성으로의 상향적 존재이다. 그래서 그는 인간의 노력과 그에 따른 무한한 가능성을 상징한다.
중국신화에도 여러 영웅들이 등장하지만 예 신화처럼 흥미진진한 것은 없다. 영웅 예에 대한 이야기는 ‘산해경’(山海經) ‘회남자’(淮南子) ‘초사’(楚辭) 등 고대의 여러 책들에 산발적으로 존재할 뿐 일관된 줄거리가 전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단편적인 이야기들을 잘 종합하면 우리는 한 위대한 영웅의 일대기를 얻을 수 있다.
중국의 전설적 성군인 요(堯) 임금이 다스리던 시대에 예라는 활 잘 쏘는 용사가 있었다. ‘초사’ 천문(天問)편에 천제(天帝)가 그를 하계에 내려보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는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온 신이거나 신의 혈통을 이은 인간이었던 모양이다.
온 백성이 태평성대를 노래했다는 요임금의 시대에도 재난의 시절이 있었다. 어느날 멀쩡하던 하늘에 갑자기 10개의 태양이 동시에 떠오른 것이다. 10개의 태양은 본래 천제의 아들들로 순서대로 하루에 1개씩 교대로 떠오르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운행의 규칙을 무시하고 한꺼번에 떠올랐다. 지상은 태양열로 인해 불구덩이로 변하였다. 강물이 말라붙고 초목과 곡식이 다 타 죽으니 백성들은 갈증과 굶주림에 시달렸다.
인자하신 요임금은 백성들의 고통을 그대로 둘 수 없어 우선 무당을 시켜 10개의 태양을 타일러 말려보도록 했다. 여축(女丑)이라는 이 뛰어난 무당은 기도로써 가뭄을 해결한 적이 많았다. 여축은 푸른 물색 옷을 입고 태양열이 이글거리는 산꼭대기에서 하늘을 향해 기도를 드렸다.
그러나 여축의 간절한 기도에도 아랑곳 않고 10개의 태양은 갈수록 기세를 부렸다. 마침내 여축은 산꼭대기에서 그 뜨거운 태양열을 이기지 못하고 까맣게 타죽고 말았다.
요임금과 온 백성은 절망감에 휩싸였다. 그리고 그들의 절망과 비탄의 한숨이 하늘에까지 닿았다. 뒤늦게야 하계의 엄청난 상황을 파악한 천제는 철부지 아들들의 행동에 당혹스럽기도 하고 책임감을 느꼈다.
천제는 곧 가장 활을 잘 쏘는 용사 예를 불렀다. 그리고 그에게 붉은 활과 흰 화살을 특별히 하사했다. 이 활과 화살은 재앙을 물리칠 수 있는 신비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천제는 예로 하여금 난동을 부리고 있는 태양들을 진정시키도록 했다.
비록 천제의 아들들이긴 하지만 하늘의 법도를 무시한 죄는 용서받기 어려웠다. 천제의 명을 받든 예는 호흡을 가다듬고 하늘의 태양을 겨누었다. 곧이어 시위를 떠난 화살은 10개의 태양 중 하나에 명중하였다. 그 태양은 빛을 잃고 지상으로 떨어졌다.
그런데 떨어지는 모습을 보니 ‘세발 달린 까마귀’(三足烏)였다. 원래 태양의 본체는 까마귀였던 것이다. 예는 계속해서 시위를 당겼다.
두 마리, 세 마리… 마침내 아홉 마리째의 까마귀가 떨어졌을 때 예는 활쏘기를 멈췄다. 태양 한 개는 남겨둬야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세상은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예에게는 할 일이 더 남아 있었다. 가뭄이 들었을 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방에서 많은 괴물들이 날뛰었는데 그것들이 아직도 백성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괴물들 중에는 소같이 생겼는데 사람의 얼굴을 한 알유 끌 모양의 이빨을 지닌 착치(鑿齒) 머리가 아홉 개 달리고 물과 불을 뿜어내는 구영 사나운 괴조(怪鳥)인 대풍(大風) 코끼리까지 삼켜버리는 큰 구렁이인 파사(巴蛇) 거대한 멧돼지인 봉희 등이 백성들에게 특히 많은 피해를 끼쳤다.
예는 천하를 다니면서 뛰어난 활솜씨로 이 괴물들을 하나하나 처치했다. 마침내 이 세상에는 다시 전처럼 평화와 안정이 찾아왔다. 예는 이처럼 백성을 위해 큰 공을 세우고 미녀 아내인 항아(姮娥)와 함께 한동안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불현듯 인간인 자신의 수명이 길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소문에 의하면 서쪽 끝 곤륜산(昆侖山)에 서왕모(西王母)라는 여신이 살고 있는데 그 여신이 불사약을 지니고 있다 하였다. 예는 곧 곤륜산으로 향하였다.
곤륜산의 서왕모의 궁전은 깊은 강과 이글거리는 불꽃으로 둘러싸여 있을 뿐만 아니라 괴물들이 지키고 있는 곳이어서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지만 예는 이 모든 난관을 돌파하고 결국 서왕모의 앞에 이르렀다.
서왕모는 예의 용기와 과거의 공로를 인정하여 그의 청을 들어주었다. 그가 영원히 청춘을 유지할 수 있도록 불사약을 하사한 것이다. 예는 기쁘게 불사약을 지니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언젠가 먹기 위해 잘 간수해 두었다.
그런데 항아는 예가 없는 틈을 타 불사약을 훔쳐먹었다. 불사약을 먹자 그녀는 몸이 가벼워져 하늘을 날 수 있게 되었다.
가뜩이나 예를 볼 면목이 없어진 그녀는 그대로 지상을 떠나 달로 숨어들었다. 일설에는 불사약을 훔친 죄로 인해 달로 간 그녀의 몸이 두꺼비로 변했다고도 한다.
딱하게 된 것은 예의 신세였다. 불사약을 잃고 아내마저 잃은 예는 제자들에게 활쏘기를 가르치는 일에 열중하였다. 제자들 중에서 봉몽(逢蒙)은 특히 재주가 뛰어나 예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예의 불행은 끝나지 않았다.
제자 봉몽은 스승 예만 없다면 자기가 이 세상에서 최고의 궁수(弓手)가 될 것이라는 흉악한 마음을 품었다. 봉몽은 어느날 복숭아나무 몽둥이로 예를 때려죽이고야 말았다. 천하의 영웅 예는 이처럼 어처구니없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고야 말았다.
그러나 백성들은 지난 날 예가 자신들을 위해 행했던 위대한 업적들을 잊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를 위해 제사를 바치고 신으로 모셨다.
예는 종포신(宗布神)이라는 신으로 숭배되었는데 이 신은 귀신의 우두머리로서 나쁜 귀신을 쫓는데에 효험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중국신화의 영웅 예의 위대한 행적과 비극적인 최후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대표적 영웅 헤라클레스를 떠올리게 한다. 헤라클레스 역시 갖가지 괴물을 퇴치하는 등의 난제(難題)를 해결하였고 마지막에는 아내 데이아네이라의 실수로 목숨을 잃었다가 죽은 뒤에야 신으로 추앙된다.
그러나 헤라클레스의 모험이 주로 개인의 은원(恩怨) 관계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데 비하여 예의 일화는 사회와 공동체의 문제 해결을 위주로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차이를 동서양의 영웅신화 전반으로 확대할 수는 없겠지만 그리스 로마 신화가 중국신화보다 인성화(人性化)된 경향이 있다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예 신화는 한국 신화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중국의 신화학자들은 예가 동이(東夷) 민족의 신이거나 군장(君長)일 것이라고 추정한다. 동이란 꼭 우리 한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중국의 동방에 거주하던 여러 민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 한국신화와의 상관성을 배제할 수 없다.
고구려 신화의 주몽(朱蒙)은 예 봉몽 등과 함께 모두 활쏘기의 명수였으며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태양을 상징하는 세발 달린 까마귀_삼족오가 출현하고 있다. 요즘도 제사상을 차릴 때 복숭아를 올리지 않는 것은 복숭아나무 몽둥이에 의해 죽음을 당한 예와 관련된 민속이다.
귀신의 우두머리인 예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복숭아나무일진대 조상 귀신들은 말할 나위 없기 때문이다.
사회와 집단에 위기가 엄습할 때 우리의 심성 깊은 곳에서는 영웅을 갈망하는 마음이 싹튼다. 신화에서 영웅은 오로지 희생으로써 과업을 완수한다. 그러나 이 시대에는 사욕(私慾)을 위한 거짓 영웅만이 난무한다. 진정 예와 같은 영웅은 이제 출현하지 않는가.
●산해경(山海經)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대표적인 신화집. 전설적인 우(禹)임금의 신하 백익(伯益)이 편찬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그러나 실제로는 서주(西周) 초기(기원전 12세기)로부터 위진(魏晉)시대(기원후 3-4세기)에 이르는 오랜 기간에 걸쳐 무당 계통의 손에 의해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모두 18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내용은 크게 산경(山經)과 해경(海經)의 두 부분으로 나뉜다.
산경은 지리적 성격이 농후하여 중국 및 주변 지역의 다섯 방향에 있는 산천의 형세와 그곳에서 나는 갖가지 광물ㆍ동식물ㆍ괴물ㆍ신령 등을 서술하고 있다.
해경은 사해(四海)의 안밖에 있는 이국(異國)의 풍속과 사물ㆍ신들의 계보·괴물 등에 대한 다양한 묘사를 통해 산경에 비해 신화적 색채가 강하다.
국내에서는 정재서 교수가 번역한 ‘산해경’(민음사 발행ㆍ1985)이 출간되어 있다.
글 정재서 이화여대 중문과 교수
그림 서용선 서울대 서양화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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