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교사였던 주포천(63)씨는 정년을 맞으면서 농부로 변신했다. 3년 전 화이트 컬러에서 블루 컬러로 옮겨온 그는 나름대로 호된 신고식을 치러야 했다.경기 포천과 제주도에서 채소 농사를 짓다 연거푸 실패한 뒤 올해부터는 품종을 귤로 바꾼 상태이다. 처음엔 “하루 일하고 하루 몸져 누울 정도”로 고달팠다는 그는, 이제는 더도 말고 딱 농부의 모습이다.
교사로 정년 퇴직하기까지 농사를 지어 본 적은 없었지만 퇴직 후에는 전원생활을 즐기겠다는 꿈을 키워나가고 있었다. 정년을 대비해 퇴직하기 5년 전부터 틈만 나면 친척의 목장을 찾아가 일을 도왔다.
농사 일은 퇴직하자마자 시작했다. 같은 해 퇴직한 친구 2명과 경기 포천에 땅을 조금 빌려 고추 깨 무 배추 등 농작물을 길렀다. 비닐하우스를 짓고 종자 농기구 농약 비료 등을 구입하느라 300만원 정도를 썼지만, 한 푼도 벌지는 못했다. 수확 시기를 놓쳐 농작물이 서리를 맞은 것이다.
씁쓸한 마음을 안고 그 해 겨울 제주도 친구 집에 놀러 갔다 아예 그곳에 보금자리를 틀게 됐다. 사실 제주도는 나에게 제 2의 고향이었다. 고향은 함경도이지만 6.25전쟁 때 제주도로 피난 가 대학교 때 서울로 올라오기까지 제주도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몇 십 년 만에 다시 찾은 제주도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아내도 너무나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마침 친구의 땅을 빌려 쓸 수도 있게 돼, 우리 부부는 제주시에서 20㎞ 떨어진 애월읍 고내리에 새로운 둥지를 틀었다.
마당에 서면 바다와 한라산이 한 눈에 보이는 집에서 나는 해질 녘 석양 빛에 넋을 놓기도 하고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를 바라보며 사색에 잠기기도 한다. 저녁식사를 끝낸 뒤 1㎞정도 떨어진 해변까지 산보하는 것은 나의 행복한 일과가 됐다. 일요일이면 산으로 등산을 가기도 하고 바닷가로 낚시를 가기도 한다.
서울의 자식들이 손자들을 데리고 가끔 찾아올 때면 기쁨은 배가 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연립주택에는 100가구 정도가 살고 있다. 우리처럼 서울에서 내려온 퇴직부부도 적지 않아 그리 적적한 편은 아니지만, 가족 친지에 둘러싸여 지내던 서울생활과는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는 밭에 나갈 때도 휴대폰을 들고 간다. 맞벌이를 하는 자녀를 위해 손녀를 데려다 키우는 아내와 하루에도 몇 번 씩 통화를 하기 위해서다.
물론 농사일이 녹록한 것은 아니다. 친구로부터 땅을 빌리고 밭에 수도를 설치하고 경운기 농기구 비료 농약을 사느라 돈도 적지않게 들어갔지만 지난 해까지 나는 아무 소득을 올리지 못했다. 한의사인 딸과 사위 덕분에 평소 한약재에 관심이 많아 첫 해에는 지황을 심었다. 그러나 농사짓는 법을 몰라 씨 뿌리는 시기를 놓치고 여름에는 잡초 때문에 고생하다 결국 지황은 말라죽고 말았다.
나이 들어 새로 일을 시작하는 것이 이렇게까지 어려울 줄은 미처 몰랐다. 모르면 배워야 하는데, 사실 이웃 농부에게 일일이 물어보는 것이 부끄러워 입이 떨어지지 않을 때가 많았다.
농업기술진흥청에서 병충해 대처법에 대한 지도도 받으면서 조금씩 땅과 작물에 익숙해갔다. 지난 해에는 밭농사와 함께 300평 정도 귤농사를 지었다. 귤농사가 훨씬 수월해 어느 정도 수확을 거두었다. 노랗게 올망졸망 익은 귤을 하나하나 따서 서울의 자식들이랑 친지들에게 나눠 주었다.
여름내 땀 흘리고 정성 쏟아 키운 작물들이 꽃을 피우고 열매 맺는 것을 바라보면서 나는 비로소 내가 선택한 노년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다. 내년부터는 귤밭을 800평 정도로 늘리고 조생종으로 바꾸면 소득도 올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노년에 농사를 짓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농사로 소득을 얻기는 힘들다’는 점을 일러두고 싶다. 나의 경우 기본적인 생활은 공무원 연금으로 해결하고 자식들이 보내주는 용돈이 있기 때문에 시골 생활을 즐기는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대신 서울과 달리 시골생활은 돈이 거의 들지 않기 때문에 수입에 연연해하지 않아도 된다. 설령 농사로 소득을 올릴 수 있다 하더라도 너무나 많은 노동이 필요하기 때문에 퇴직 후 돈이 필요한 사람이라면 잘 생각해서 결정해야 하는 것이 좋을 듯 싶다.
아내의 동의도 필요하다. 아내가 시골생활을 좋아하지 않는 경우, 결국 따로 살게 되기 때문이다. 전혀 경험이 없는 경우라면 3~5년 정도는 미리 농사에 대해 공부하고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 시행착오를 거치며 배우는 기간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일의 양도 조금씩 늘려가야 하고 땅에 투자하는 것도 천천히 결정하라고 권하고 싶다. 너무 과중한 노동으로 건강을 해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즐기면서 할 수 있을 정도의 규모로 시작해서 ‘이제는 될 것 같다. 자신이 있다’라는 생각이 들 때 비로소 땅을 구입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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