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1년(신미년) 5월21일 강화도 광성진에서 미해군 육전대와 조선군 사이에 포격전이 벌어짐으로써 신미양요가 시작됐다. 조선과 미국의 첫 군사 분쟁으로 기록될 이 전쟁이 마무리된 곳도 광성진에서였다.그 해 5월16일 주청(駐淸) 전권공사 로우에게서 조선 원정 명령을 받은 미국 아시아함대 사령관 로저스는 군함 5척, 함재(艦載)대포 85문, 병력 1,230명을 이끌고 일본의 나가사키(長崎)항을 떠났다. 1866년의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빌미삼아 무력으로 조선을 개항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제너럴 셔먼호는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통상을 요구하며 약탈을 일삼다가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朴珪壽)가 이끄는 조선군의 포격으로 선체가 불타고 승무원 23명 전원이 소사하거나 익사한 바 있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우발적이었던 데 비해 신미양요는 양측의 적의가 또렷이 개재된 작은 전쟁이었다. 5월21일의 첫 충돌 뒤 일단 물러난 미군은 조선 정부의 사과와 손해배상을 요구했고, 이 요구가 거부되자 6월10일 강화도 초지진에 육전대원 644명을 상륙시켰다.
초지진과 덕진진을 차례로 함락해 점령한 미군은 광성진에서 조선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쳤다. 광성진 싸움에서 조선측은 진무중군(鎭撫中軍) 어재연(魚在淵) 등 53명이 전사하고 24명이 부상했다.
미군측에서는 매키 중위 등 사망자 3명 부상자 10명이 나왔다. 미군은 결국 광성진까지 점령했으나, 조선 조정의 쇄국입장이 완강한 데다 조선군의 반격이 거세지자 확전을 포기하고 일본으로 되돌아갔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 직후에 일어난 프랑스군의 강화도 침범(병인양요)에 이어 신미년에 미군의 침입까지 받게 되자 흥선대원군은 전국 각지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우고 나라의 문을 더 굳게 닫았다.
고종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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