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사회가 성숙하면서 낡은 패러다임으로 치부되고 있는 민족주의를 재평가하려는 지식인 사회의 움직임이 활발하다.이런 가운데 한국인으로 태어났지만 한국인으로 살지 못한 재일동포 학자와 한국인이 아니었지만 한국인이 된 귀화 한국인 학자가 민족주의를 놓고 본격적인 논쟁을 벌였다.
화제의 주인공은 재일동포 2세인 윤건차(58) 일본 가나가와대 교수와 러시아 출신의 귀화 한국인 박노자(31)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대학 때 비로소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한 윤 교수는 개화기부터 1990년대까지 100년동안의 한국 지성사를 정리한 ‘현대 한국의 사상 흐름’(2000년)이라는 저서를 통해, 박 교수는 90년대 후반부터 한국인이 미처 깨닫지 못하는 한국사회의 불합리를 예리하게 비판한 신문 칼럼을 통해 각각 한국 사회에 이름을 알렸다.
최근 나온 계간지 황해문화 여름호는 홍윤기(45) 동국대 철학과 교수의 발제로 윤 교수와 박 교수가 민족 담론의 입장차이를 밝히는 형식의 지상토론 ‘다시 생각하는 민족주의의 빛과 그림자’를 마련했다.
윤교수는 그동안 꾸준히 민족담론을 재활성화하자는 입장인 반면 박교수는 탈민족주의적 현대성의 보편적 완성을 지향해왔다.
홍교수는 이들에게 “민족주의를 추종하는 쪽이나 그것을 전면해체하는 쪽을 다같이 만족시킬 수 있는 탈민족적 정의는 가능하냐”고 묻는다.
이에 대해 윤 교수는 “1990년대 한국 지식인사회가 왜소해지면서 거대담론인 민족담론을 폐기해버렸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러한 경향은 국가ㆍ민족공동체를 부정하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논리와 맞닿아 있다고 비판하고 자본주의라는 조건, 분단국가라는 상황 속에서 민족은 버릴 수 없는 인식 틀임을, 그리고 민족을 통과하지 않고는 세계시민도 될 수 없음을 역설한다.
반면 박 교수는 민족주의의 순기능을 부정하지는 않겠지만 역기능이 압도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그 중 가장 심한 것으로 민족주의 자체가 갖고 있는 폭력성을 꼽는다. 예컨대 미국인의 90%가 아프가니스탄 침략을 지지하고, 유럽이 제3세계 출신 망명 신청자에게 더 가혹해지는 현상은 민족개념의 폭력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는 것.
한국의 민족주의 역시 정도의 차이는 있다 해도 마찬가지라고 지적한다.
박 교수는 또 “민족국가라는 패러다임이 해체에 이르지는 않더라도, 후기자본주의 사회가 초래하는 근로자의 생존권 박탈과 환경파괴가 국적을 초월해 이뤄지는만큼 이에 대응하는 각지의 민중에게는 민족보다 훨씬 상위의 정체성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한편 이번 특집에 기조 에세이를 발표한 문학평론가 김병익씨는 “ 세계적 차원에서 세계시민으로서의 보편적 자질을 함양하면서도 민족의 개별성과 특수성을 견지해야 한다”는 절충안을 내놓았다.
김영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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