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근처에서 자랐고 서울에 온 지 3년 밖에 되지 않는다.하지만 서울 생활이 한국인들과 특별히 다르지 않다. 학생이니까, 아침 일찍 일어나 대부분의 시간을 책상 앞에서 보낸다.
깻잎 장아찌의 냄새를 좋아하고 김치찌개로 매 끼니를 때운다. 주말엔 친구들과 여행을 갔다 돌아오는 길에 함께 동동주를 마신다.
봄엔 진달래를 만났고, 지난 주말엔 막 피어나는 장미꽃송이를 보았다.
다른 것도 물론 있다. 어린 아이들은 내 팔뚝에 털이 너무 많다며 털을 뽑으며 놀기도 한다.
어떤 날은 어느 여자 아이와 단 둘이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아이가 “외국 사람이다”라고 중얼거렸다.
내가 한국말로 “아니. 한국사람이지”라고 했더니 소녀는 내 외모와 ‘한국인’이라는 말 사이의 간극이 당혹스러운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다가 내릴 때 내게 씽긋 웃어 보였는데 난 그녀가 이해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 웃음은 나의 팔뚝에서 뽑혀 나간 많은 털보다 더 값진 것임을 알았다.
무엇보다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언어의 문제인데 나의 모국어인 영어와 달리 한국어는 문장에서 주어를 자주 생략한다. 그리고 이 생략은 대화를 친밀하게 만든다.
주어를 생략한다는 것은 ‘우리는 말하고 있는 것에 대해 이미 서로 알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이는 공감의 확인이다.
최근 김소월의 시‘진달래꽃’을 공부했는데 “나 보기가 역겨워/가실 때에는/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라는 구절에도 생략되었지만 암묵적인 주어 ‘당신’ 이 있다.
이 생략이 많은 독자들에게 공감을 불러 일으켰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소월이 쓴 시론에서 이 ‘당신’에 해당하는 것이‘시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결국 우리 모두‘당신’을 이해하는 만큼 소월의‘시혼’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 경지는 이미 언어를 넘어선 우리 마음 속에서 운용되고 있는 세계이다.
‘당신’은 한자 혼(魂)이 의미하듯 보이지 않지만 마음 속에서 떠나지도 않는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당신’이라고 차마 말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보는 꽃이 ‘azaleas(진달래)’와 같은 개념 이전인 것처럼 시는 진정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 말할 수 없다.
엘리베이터 안 소녀의 웃음이 아름답지만 슬픈 것은 그런 까닭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신비를 공유한다.
우리 모두 그 것이 그 곳에 있음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장미가 사랑하기 전에 이미 피어나 있듯이.
/웨인 드 프레머리 미국인 서울대 국제지역원 석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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