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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 이주일(46)사퇴 선언과 번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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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 이주일(46)사퇴 선언과 번복

입력
2002.05.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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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유명해지기 전의 일이다.아내가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큰 딸 미숙(美淑)에게 호박 하나를 사오라고 50원을 줬다. 그런데 미숙이는 떡볶이를 사먹느라 10원을 쓰고 대신 40원짜리 호박을 사온 모양이다.

아내는 이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호박을 내팽개치고 딸 애를 야단쳤다. 아이가 고백을 할 때까지 3일 동안 회초리를 내려놓지 않았다.

갑자기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내가 국회의원이 된 후 사람들이 이렇게 살아온 나와 우리 집을 이상하게 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특히 1993년 초 고위공직자 재산공개 파문이 일었을 때에는 내가 무슨 부정 축재자인 것처럼 소문이 났다.

4월6일 기자회견을 통해 사퇴 선언을 하고 재산을 공개했을 때에는 기다렸다는 듯이 “사정정국의 칼날을 피하기 위해 미리 선수를 친다”는 보도가 잇따랐다.

정말 미칠 지경이었다. 야간업소 무대에서 남들 웃겨주고 번 돈인데, 150원짜리 자장면에 물 말아 둘이 나눠먹으며 저축한 돈인데 부정 축재라니….

어머니를 위해 사드린 성남시 율동의 땅 2,000평도 부동산 투기용으로 사들인 것이라고도 했다.

“그렇게 떳떳하면 왜 하필 이때 사퇴를 하려느냐”는 소리까지 들렸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내가 사퇴를 선언한 것은 국회의원 당선 직후부터 느꼈던 정치인 생활에 대한 회의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한 달에 지구당에 들어가는 2,000만원이 너무 아까웠다. 4년 국회의원 생활을 하려면 10억원이다.

그렇다고 국회의원이 됐다고 무슨 큰 돈이 들어온 것도 아니었다. 수입은 없고 지출은 자꾸 늘어가는데 정말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러나 결국 사퇴는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기자회견 다음날 정주영(鄭周永) 회장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분당 집으로 찾아온 것이다. 수행원만 30명 가까이 됐다.

“어떻게 해서 얻은 국회의원 자리인데 왜 그만 두려고 해? 나만 믿고 계속 해봐. 지구당 관리비는 당에서 모두 지원하도록 해줄게.”

근 한 달 동안 정 회장은 내 사퇴를 막았다. 나는 도저히 정 회장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다.

그래서 5월12일 사퇴의사를 번복하는 기자회견을 가졌는데 이것 역시 또 문제가 됐다. 이번에는 내가 슬롯머신 스캔들에 연루돼 그 방패막이로 의원직을 유지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검찰이 ‘슬롯머신 대부’로 알려진 정덕진(鄭德珍) 당시 희전관광호텔 회장을 구속 수사하면서 그와 친분관계가 있는 나를 소환 조사할 것 같으니까 미리 기자회견을 가졌다는 해석이었다.

답답했다. 사퇴하려고 해도 뭐라 그러고, 사퇴를 안 한다고 해도 뭐라 그러고.

물론 정덕진 회장은 내가 60년대 말 스카라극장 주변을 배회하던 시절부터 잘 알고 지냈던 사이다.

당시 연예인 지망생 중에서 연예계 대부로 통하던 그와 인연을 맺지 않은 사람은 아마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89~91년 이태원 캐피탈호텔에 슬롯머신 지분을 가졌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은 우리나라에 슬롯머신을 처음 들여온 최봉호(崔奉鎬) 회장의 권유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내가 정덕진 회장과 맞먹는 슬롯머신 업계의 대부라고 했다.

신물이 났다. 더욱이 사퇴를 한다고 하니까 구리 지역구 사람들은 거의 매일 집 앞에 몰려와 데모를 했다.

“기껏 뽑아줬더니 이제 와서 그만 두면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었다.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 춤을 춰야 하나. 차라리 배고팠던 옛날이 마음 하나는 편했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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