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의지나 감성으로 가장 자제하기 어려운 것이 쏟아지는 잠을 쫓는 것이라 했던가!1979년 유치과학자라는 이름으로 귀국해 핵연료 국산화 공정중의 하나인 우라늄 변환공정을 비커에서 시작해 상용공장을 건설하기까지 10년의 세월은 고난과 좌절, 그리고 보람을 안겨준 시절이었다.
연구원 6명에 1,000만원도 안되는 연구비, 부족한 실험기구, 냉난방시설조차 없는 열악한 실험실….
기초실험을 끝내고 실증실험 시설(pilot plant)을 세우는 과정에서 필요한 부품을 구하기 위해 청계천 주변 상가를 수도 없이 돌아다녔다.
그 당시 청계천 상가는 한국기업을 키우는 모든 부품의 공급처였다. 그렇게 만들어진 핵연료 실증실험 시설에서 연구자료를 얻기 위해 10명의 연구원이 2조 2교대로 운전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12시간 단위로 맞교대 근무를 했지만 쉬는 12시간에 충분히 잠을 자기 못해 24시간 교대 근무로 바꿨다.
그래도 40일 동안 하루 일하고 하루 쉬는 연속작업은 참기 힘들었다. 특히 쏟아지는 졸음은 정말로 참기 힘든 것이었다.
1985년 겨울인가, 난방은 전혀 되지 않고 천장이 유난히 높은 실험실에서 추위와 긴장감, 그리고 쏟아지는 잠과 허기에 지친 우리가 가장 기다렸던 것이 연구소 앞 동네 아줌마들에게 부탁해 자정쯤 끓여오는 뜨끈뜨끈한 닭죽이었다.
모두 큰 냄비 주변에 둘러앉아 시골 아줌마의 정성이 담긴 푸짐한 김치와 함께 먹는 닭죽의 맛. 그 닭죽과 김치의 맛은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닭죽은 연구원 상호간에 형제애와 같은 정을 갖게 하였으며, 핵연료 국산화 의지를 다지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89년 상용공장을 완성하기까지 10여 년간 우리가 먹었던 수천 마리 닭의 영혼을 위해 제사라도 지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한 연구원이 제안하기도 했다.
이제 우리 국민이 쓰는 전기의 40% 이상을 원자력발전이 공급하고, 원자력 기술은 선진국 대열에 올라섰다.
힘들었던 그 시절, 무려 10여년간 우리의 허기진 배를 채워 밤새도록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주었던 닭죽을 그래서 잊을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장인순 한국원자력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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