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딩크 감독의 훈련노트를 분석하면서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발견했다. 알고 있는 것과 가르치는 것은 다르다는 점이다.히딩크가 선수들에게 가장 강조한 ‘포지션별 명확한 임무수행’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히딩크는 4-3-3이든 3-4-3, 4-4-2든 시스템에 관계 없이 포지션별로 선수들에게 자기 임무를 확실하게 수행하도록 했다.
먼저 가장 중요한 미드필더는 공격형이나 수비형을 막론하고 상대를 따라 다니면 안 된다. 말하자면 히딩크는 철저히 지역방어를 요구했다.
이전의 한국축구는 미드필드 지역에서도 대인마크를 했고 그래서 선수들이 히딩크의 전술을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이것은 한국축구에서 큰 변화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수비형 미드필더는 오른쪽 풀백이 공격할 때 같이 공격해선 안되고 빈 자리를 커버해야 한다. 이 때 왼쪽 미드필더 역시 커버플레이에 들어 간다.
윤정환 안정환 같은 공격형 미드필더는 투 스트라이커와 함께 위치상 삼각형 모양을 유지해야 한다. 공이 없을 때는 과감한 2선 침투로 공간을 만들고 볼을 가졌을 때는 본인이 돌파해 찬스를 만들든가 다른 공격수에게 패스를 해야 한다.
상대 스트라이커를 전담 마크하는 스토퍼(최진철 김태영)는 절대 공격에 가담해선 안 된다. 특히 미드필드까지 전진했을 때는 상대 스트라이커를 따라가지 말고 지역방어를 해야 한다. 단 우리진영 35m 이내에선 대인마크를 한다.
이전의 한국축구는 스토퍼들이 미드필드에서도 대인방어를 했다는 점에서 이 역시 우리 축구가 한단계 발전한 점이다. 우리 지도자들의 경우 이런 이론을 알면서도 실제 선수지도에서 활용하지 못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또 하나 배울 점은 히딩크는 원활한 임무수행을 위해 하나의 원칙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미 언론에도 보도됐듯이 선수들간 의사소통 문제다. 지시를 내리는 주체는 반드시 옆에 있는 선수와 더 넓은 경기 시야를 확보할 수 있는 후방에 위치한 선수가 된다.
예를 들어 골키퍼는 수비수에게, 수비수는 미드필더, 미드필더는 포워드에게 의사를 전달한다. 상대를 파악하면서 해야 할 역할을 서로 알려줌으로써 플레이를 유기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한국선수들은 종전까지 위치별 임무가 명확치 않았다. 일례로 사이드백이면서도 공격형 미드필더, 또는 최전방 공격수의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히딩크는 자기 임무를 벗어난 행동에 대해서 철저히 제동을 걸었다. 처음 경기내용이 나빴던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선수들이 자기의 임무를 확실히 이해하고 동료들과 의사소통이 원할해짐으로써 수비-미드필더-포워드 등 3선이 기본적으로 좁은 간격을 유지하면서 공수 전환을 빠르게 할 수 있게 됐다. 팀 밸런스, 즉 공수의 균형이 갖춰지게 됐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다.
이전에 역습을 자주 허용했던 한국축구가 이제 역습에 의한 위기상황이 줄어든 것은 바로 포지션별로 자기 임무를 벗어나는 플레이가 줄었기 때문이다.
김희태ㆍ명지대 감독
■"김남일·이을용처럼"
김남일(전남)과 이을용(부천)은 자기 임무를 명확히 수행한다. 그래서 히딩크 감독의 총애를 받는다. 둘은 각각 패스와 센터링의 정확도에서 약간의 문제가 있지만 절대 자기 역할의 범위를 넘어서는 경우가 없다.
개인기가 좋은 이영표가 둘에게 밀리는 이유는 수비의 안정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히딩크의 포지션별 임무론이 자리를 잡아가면서 수비에 안정감이 생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우리 수비진은 중앙돌파나 짧은 패스 중심의 상대공격 대처능력은 많이 좋아졌다. 임무수행과 의사소통 능력이 좋아져 협동수비가 향상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좌우 측면, 또는 미드필드 후방에서 길게 날아오는 정확한 센터링에 이은 고공 공격이나 직진패스에 이은 상대 미드필더들의 2선침투에는 약점을 보인다.
개개인의 능력이 아직 높은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는 증거다. 우리 수비가 단 한번의 패스에 의한 공격에 약하다는 사실은 이미 본선 상대국에게 파악되었을 것이다. 대책마련이 시급하다.
■시야 넓은 후방선수가 플레이 지시의 주체
히딩크 감독이 강조하는 포지션별 임무는 선수들간 의사소통을 통해 완성된다. 수비형 미드필더 김남일의 경우 상대 공격형 미드필더를 저지하는 것이 기본임무다. 그런데 김남일이 그 공격수에게 돌파를 당했을 때 어떻게 할까.
기본적으로 김남일의 후방에 위치한 중앙수비수 홍명보가 지시를 내려야 한다. 예를 들어 홍명보가 “남일아, 내게 맡겨”라고 말하면 김남일은 상대공격수를 뒤쫓는 일을 그만두고 다른 지역을 커버한다.
그러나 홍명보가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을 때 그 공격수를 끝까지 마크해야 한다. 이러한 의사소통을 통해 포지션별 임무가 구체적이고 명확해지는 것이다.
유승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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